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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class Feb 14. 2024

동심

2023년까지 나의 카톡 상태메시지

카카오톡 프로필에서 상태메시지에 의미를 두는지는 잘 모르겠다. 프로필 사진 또한 그렇고.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교직에 있었던 나로서는 프로필 사진과 상태메시지에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일단, 학교라는 집단에서 학생들의 생활환경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프로필 사진에 나의 경제적 여건을 암시하는 어떤 메시지를 올릴 필요가 없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의 차원도 있고. 가능하면 가족의 사진도 최소화한다. 교사의 연락처는 학생에게만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와 동료교사, 조금 멀리 보면 업무상의 관계로 잠시 스친 많은 사람들에게도 내 SNS 프로필이 공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필 사진은 가능하면 어떤 정적인 사물, 또는 편안한 이미지를 추구하게 된다.

상태메시지에서는 가능하면 개인의 감정을 표출하는 글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런 메시지를 공개해서 일부러 아이들에게 "선생님 기분이 좋지 않은가 봐?"라는 이야기에 노출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때문에 하나의 추상적인 상태메시지가 결정되면 오랜 시간 특별한 변화 없이 유지되곤 한다.

아참! 스승의 날, 졸업식 사진 촬영 등에서는 예외이다. 그때는 지도한 아이들의 사진이 업데이트되곤 한다.


아무튼, 그렇게 오랜 시간 바뀌지 않았던 나의 상태메시지의 글은 "동심"이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같은 마음을 의미하는 동심이었다.

네 마음과 내 마음이 같아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상황. 그렇게 되기 위한 다짐. 그리고 노력.

물론, 약간의 거짓은 있었다.

그래도 교사였기에, 학생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을 공감한다는 의미가 90%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앞에서 당겨주는 역할도 있어야 했다. 함께 행군을 한다고 비유한다면 나도 네 고통을 나누겠어라는 심정으로 속도를 맞추지만, 알게 모르게 살짝 앞서가면서 상대가 쓰러지지 않게 하는 정도의 맞춤?


같은 마음의 의미가 학생에게만 의미를 부여한 단어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환경이지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힘겨운 삶을 이겨내고 있음을 항상 인식하자는 의미의 동감도 있었다. 나만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나만 거지 같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였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고군분투를 하고 있음에 대한 동감이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음이 움직인다는 의미도 있었다.

결코 내 자리를 고집하면서 상대의 상황을 수용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런 듯하다.


그 무렵 듣고 분노했던 이야기가 있었다.


우수한 학생을 배출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던 학교가 있었다. 학교장은 우수한 학생 배출을 위해서 우수한 교사를 모집하려 노력했고, 소위 SKY 출신의 교사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영입과정에서 어떤 협상이 있었는지 등등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영입한 우수한 교사 몇몇이 수업시간에 이상한 행태를 보였다.

그중에 하나가 아이들에게 특정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것도 몰라? 딱 보면 아는 거 아닌가?"라는 말이었다.

부끄럽게도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선생님들이 종종 있다. 물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연산문제는 딱 보면 아는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언급되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무시하듯 말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아니, 모르니까 배우러 오는 것 아닌가? 모르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만든 현장에 참여하는데, 미리 공부하고 오라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 아닌가?

아무리 선행학습을 하는 아이들이 상당수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선행을 했다는 가정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90% 이상의 학생이 선행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학교 수업에서는 10%의 선행을 하지 않은 아이를 위한 수업 진행은 필수여야 하고, 이 과정에서 속도의 조절, 완급의 조절, 난이도의 조절을 위해서 교사라는 소위 수업 전문가가 투입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설명 없이 나는 딱 보니 알겠고 이해가 가는데 너는 왜?라는 말이 교사의 입에서 나와도 되는 말이란 말인가? (너무 감정이 앞서게 되는 것 같다. 잠시 숨을 돌리고.)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나의 관점에서 상대를 내려보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상대의 관점으로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공감해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학생들을 보면서 그래도 그때가 좋은 거라고 어른들은 이야기한다. 이 말도 자신의 관점에서 상대를 보는 것이다. 아이들도 힘들다. 쉽게 놀고먹고, 자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나름의 과제를 한다고 바쁘고, 교우관계로 힘들고, 미래에 대한 고민과 답답함으로 힘들다. 어른들의 잔소리와 조언이 아이들에게 빛이며 출구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의 힘겨움에 대한 토로가 많다. 그것도 모르고 아이들을 보면서 그때가 좋은 거라고 말하는 단순함은 어쩌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과 환경에 도취되지 말아야 한다. 자칫 그러다가 쉽게 꼰대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린이의 마음이었다.

동심.

아이의 순수함. 물론, 그런 순수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이고, 자칫 그러한 순수가 마치 호구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기에, 조금은 선별적인 순수의 의미였다.


연차가 지나도 초임의 마음을 잃지 말자는 의미였고, 나의 경험과 경력에서 오는 규칙성이 스스로에게 선입견으로 작용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매일, 매주, 1년을 기준으로 반복되는 틀 안에서 작은 변화를 관찰하고 그것에 기뻐하는 모습을 얻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었다.


요약해서 이야기한다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한 다짐이었다고 할까?


뜬금없이 나의 상태 메시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 계속 떠오르는 다른 단어가 있어서, 이제는 슬슬 상태메시지를 바꿀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서 글을 남겨본다. 비록 글은 바뀌어도 당시 내가 가졌던 마음가짐은 유지하자는 다짐에서 글을 남기게 되었다.


동심.

많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물론, 단어에 부여한 나만의 의미가 내 삶에 얼마나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적어도 인지한 것과 인지하지 못한 삶에는 분명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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