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쓰기 41일차
큰 부모는 작게 될 자식도 크게 키우고,
작은 부모는 크게 될 자식도 작게 키운다.
- 손웅정 감독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손웅정 감독님의 인터뷰를 접하게 되었어요.
"친구 같은 부모. 그건 직무 유기."
이 말에는 공감이 어려웠어요.
아마, 성장 환경의 차이가 아닐까요? 물론, 정의에 대한 차이도 있을 것 같아요.
제 경우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학생들과 지냈던 경험이 있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느낄는지 모르지만, 저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었지요.
복도에서 아이들에게 가끔 장난도 걸어보고, 농담도 하고 말이지요.
수업에 들어가면서 항상 농담 거리를 준비해서 들어갔어요. 수업 중반에는 꼭 유머스러운 이야기를 했거든요. 가능하면 수업을 조금 일찍 마치고 아이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아이들과 간격을 좁혀갔지요.
"친구 같은 선생님"이라고 해서 제가 아이들에게 만만한 선생님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학교에 있으면서 학생부, 소위 생활지도부를 다년간 했었거든요. 왜, 교문 앞에서 복장단속하는 그런 선생님 있지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교과가 수학이다 보니 사실, 그렇게 무섭게 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깐깐하게 봤었어요. 그래서 더 편하게 다가가려 노력했지요. 그래야 아이들이 쉽게 다가와서 질문하니까요.
여기서 정의의 차이가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친구"는, 상대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의 변화에 최대한 기다려주며 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최소의 기준점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우리 애는 그렇지 않은데, 그 녀석 만나서 그렇게 된 거예요."
종종 학생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해서 부모님을 모시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요.
자신의 아이가 잘못한 것에 대한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하는 심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사실 가까이에서 학생을 관찰한 교사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그 아이에게도 그런 성향이 있었고,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고 문제를 일으킨 경우도 많거든요.
친구라는 존재가 아이의 성장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면, 반대로 친구라는 존재로 아이의 성장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친구 같은 선생님을 목표했어요.
"야, 너 나랑 진짜 친구라면서 이 부탁 하나 못 들어줘?"
"너 나랑 이런 관계인데 이 정도 부탁 하나 못 들어준다고?"
여기서 "이 정도" 영역에 아이들의 최소 기준치를 이야기했었지요.
교육심리학에서는 "레포"라고도 이야기해요. 아이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관계에 기초해서 아이들에게 옳은 것을 부탁하면 아이들은 그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지요. 그렇게 아이들의 성장을 유도하는 거예요.
부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물론, 제 아이가 아직 성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런 교육관으로 아이를 대하지요. 아이와 친하게 지내요. 가끔은 모른 척, 못 본 척도 하지만 기다려주지요. 그래야 친구니까요.
관심과 걱정이라는 핑계로 모든 것에 간섭해서 아이가 스스로 성장하는 힘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친구 같은 부모로 살아가려 해요. 그렇지만, 그런 핑계로 아이의 성장 과정을 방관하는 것은 정말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지요.
인터뷰 내용에서 인상적인 부분, 공감 가는 부분은 독서와 축구로 가득한 독서 노트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는 부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성장하거든요. 부모가 독서하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하지요.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부모가 자신의 삶을 대하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고 그 모습을 배우면서 성장하거든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손흥민 선수는 아마 아버지께서 축구에 가지고 있는 애정과, 축구를 받아들이는 삶의 방식, 그리고 독서를 통해서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알아가는 방법을 보고 배웠던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이 되었어요.
사람의 그릇은 어느 정도 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환경에 따라서, 유전적 요인에 따라서 등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독서를 통해서 후천적으로 키울 수도 있고, 그릇의 강도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독서하지 않는 부모, 이야기를 듣지 않는 부모, 고민하지 않는 부모는 자신의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고, 아이의 그릇을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키우려 해요. 그렇지만, 독서하는 부모, 이야기를 듣는 부모, 고민하는 부모는 자신의 그릇이 작아도 아이의 그릇을 키워서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그릇도 키우면서 아이의 그릇도 키우게 되지요.
결코, 나이 먹는다는 것이 지혜의 깊이, 그릇의 크기와 비례하지는 않아요. 결단코 말이지요.
만약, 그게 맞는 논리라면 양로원, 경로당에서는 성인들이 계속해서 나와야 하겠지요.
지혜의 깊이, 그릇의 크기는 노력에 비례한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고, 이야기로 나누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말이지요.
공부합시다.
지혜로운 어른이 되기 위해서.
지혜로운 부모가 되기 위해서.
지혜로운 노인이 되기 위해서.
행복한 내 삶을 위해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