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화(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감정은 아직 두려움, 서글픔, 안타까움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다시 젊어질래?"라고 누가 묻는다면 "흠... 굳이?"라고 답하게 되는 걸 보면, 저 감정들 주변 어딘가에는 반가움, 편안함, 기대됨도 있단 얘기. 그런 좋은 면 중 하나는 어린 시절에 비해 '화'나는 감정에 휩싸여 있는 시간이 많이 짧아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화만 주야장천 내고 있기엔 날씨가 너어~무 좋다.
비 오고 흐리고 미세먼지에 황사까지 궂은날도 많지만 대체로 1년 365일을 짚어보면 맑은 날이 더 많은 게 우리나라이지 않나 싶다. 더욱이 요즘처럼 한 차례 비가 많이 온 뒤 가을의 심장부를 향해 점점 들어가는 길목의 날씨란, 정말 너어~무 좋다. 조금 더 지나면 단풍 드는 깊은 가을의 그 풍경이 은근히 꼬순 나뭇잎 냄새와 밟을 때마다 과자 씹는 것처럼 아작거리는 소리까지 가미되어 상상되면 맛있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그만큼 날씨 감수성이 높아졌달까? 그 덕에 매일 아침 강아지 단지와의 산책 길에서도 작년보단 올해, 어제보단 오늘 더 민감하게 그 날의 온도, 습도,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게 됐다. 아침 공기가 맑고 바람이 딱 알맞게 선선했던 오늘 같은 날엔, "와, 정말 좋다!" 감탄사도 절로 나온다. 그리고 냉큼 단지에게 말도 건다. "바람 너무 좋다, 그렇지?" 녀석은 기분 좋을 때마다 길어지는 붉은 혓바닥을 내어주곤 이내 이슬 맞은 풀 숲, 누군가 떨어뜨린 작은 휴지조각 한 장, 제 친구가 다녀간 것 같은 담벼락 그 모든 것에 코를 박고 '킁킁' 탐색하기 바쁘다.
아침 산책을 마치고 더 밝아진 빛 속에 나서는 출근길에는 더더욱 감각들이 살아난다. 어제는 샛 초록이었는데 오늘은 살짝 불그스레 변한 나뭇잎, 햇빛 받는 양이 달라져 그 형세도 달라 보이는 저 너머 산줄기. 살짝 차가워 슬쩍 쓰다듬게 되는 팔목 살갗, 끈적임은 줄고 순수하게 더 촉촉해진 흙내음...
그렇게 그날의 날씨를 만끽하다 보면 그전까지 있었던 '화'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때론 남편, 때론 직장 상사, 때론 옆집 여자... 날카롭게 뾰족해있던 화가 물컹해진다. '이 좋은 날씨에, 이 화가 웬 말? 내가 화를 내면서 보내도, 평화롭게 보내도 아랑곳 않고 시간은 그냥 흐르고 날씨는 이리 좋은데?!'
아까운 거다, 좋은 날씨가. 그걸 만끽해야 는 기분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 그것들의 총합인 나의 '날'이.
그 덕에 조금 전까지는 손이 잘 닿지도 않는 구석까지 덕지덕지 많이도 붙어있던 '화'는 꽤 좁쌀만 한 크기로 작아지고 쉬이 떼내기 쉬운 손등 언저리로 자리까지 옮겼다. 뭐, 그 정도면 당장 꼭 깔끔하게 떼 버리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다. 어쩜 더 작아질 것도 같고, 설령 다시 커질지언정 내가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게. 좋은 날씨 덕에, 그걸 느낄 줄 알게 된 덕에, 오늘의 난 어제보단 조금 더 나의 '날'에 집중할 수 있게 됐고, 남에게 향하는 화의 '날'을 적당히 부드럽게 마모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됐다.
그러니 나이 들면서 점점 더 커진 나의 날씨 감수성이여, 격렬히 반기고 있으니 더 솟아나렴! 화만 내고 있기엔 날씨가 너어~무 좋고 나의 '날'은 너어~무 아깝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