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남의 말, 맘의 말 말고도

by 빛들때

요즘처럼 부쩍 차가워진 날, 거실 볕 좋은 자리는 늘 강아지 단지 차지다. 어쩜 그리 요리조리 잘 찾아가는지... 이를테면 창문의 격자무늬에 따라 생기는 작은 그늘조차 몸에 닿을까 조심스레 피해 설랑은, 오로지 따뜻한 빛만으로 채워지는 작은 네모칸 안에 기어이 몸을 쏙~ 똬리를 틀고야 마는 식이다.



얼마 전까지는 정반대였다. 그러니까 한참 더웠던 날들의 단지 자리는, 볕이 그 꼬리를 내리기엔 너무 먼 식탁 옆 바닥이거나 안방 베란다에 깔린 타일 위였다. 한여름 산책 길 중간중간, 대체로 1층에 있기 마련인 대리석 바닥의 건물을 향해 리드 줄을 있는 힘껏 끌어대 우릴 이끈 뒤 그 바닥에 배를 대고 얼마간은 쉬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기가 막히게 아는 거다, 녀석은. 자신의 몸이 지금 어떠하고 어떻게 해줘야 하는 지를. 그만큼 '몸의 말'을 잘 듣는 거다.



나도 언제부턴가 단지처럼 제 '몸의 말'을 잘 듣는 학생이 되었다. 불과 몇 년 안 됐지만, 한 때 그 영역에서 영락없는 낙제생이었다면 이젠 제법 중상위권은 될 거 같다. 실 때 되면 몸이 재깍재깍 지침을 내리니 못 알아먹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일단 날이 추워지면 제일 먼저 신호를 보내오는 곳은 엄지 손가락 손톱 양끝에 맞닿아있는 살점이다. 정말 정확하게, 그 부분은 추위가 시작되면 갈라진다. 올해도 때 이른 추위로 사람들이 입은 패딩점퍼가 어색하지 않았던 지지난 주 그 어느 날 갈라져 따끔 통증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작되는 거다.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손등과 손바닥이 찢어질 거 같은 건조함, 손가락이 특히 아린 손 시림 증상도.



그럼 난 몸의 말에 따라 숙제를 시작한다. 일단 한여름 잠깐 소홀했던 핸드크림을 바르는 데 공을 들인다. 특히 갈라져 따끔대는 엄지 손가락 양끝의 살점에는 더더욱 정성스레 발라준다. 시로 손등과 손바닥에도 꼼꼼하게 발라준다. 그리고 이걸 신호탄으로 예습도 시작한다. 침대 위 여름 이불을 걷어내고 더 두터운 간절기 이불을 깐다. 옷장을 정리하고, 어제까지는 맨다리 위에 입었던 원피스 안에 속치마를 더 입고 스타킹도 꼭 신는다. 그렇게 한 해의 더위를 보내고, 한 해의 추위를 준비하는 거다. 볕 드는 따뜻한 곳을 찾아 똬리 트는 단지처럼, 깊은 숲 속 어딘가에서 양식을 모으며 긴 겨울잠을 준비하는 여느 동물들처럼.



엊그제 점심 산책 길에는 동료 상담사들과 요즘 MZ 세대는 운동에도 열심이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면 부어라 마셔라 일단 '술'에 풍덩 빠져보던 시대와는 딴판으로 젊은 친구들이 술도 덜 먹고 몸도 잘 챙기더란 이야기도 이어졌다. '우리 때완 달라, 근데 좀 낭만이 없네~'라며 우리의 늙음을 애써 위로하는 말들도 오갔다. (평균 40대 중반 여성들이니 귀엽게(?) 봐주자) 하지만 그런 친구들도 옷차림에서 묻어 나오는 청춘의 티는 별반 다르잖은 거 같다. 오늘같이 한 자릿 수의 온도로 시작되는 춥디 추운 날에도 그들은 얇디얇고 짧디 짧은 옷으로 한껏 멋을 부리니 말이다. '여름 멋쟁이는 더워 죽고 겨울 멋쟁이는 추워 죽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 그대로.



남들보다 더 특별하고 두드러지길 바라는 욕구는 특히나 청춘을 멋쟁이로 만든다. 그러면서 청춘은 늘 마음에도 멋을 내기 바쁘다. 무리에서 벗어나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맘의 말(자기 위주의 기분이나 감정), 남의 말(관계에서 파생되는 인정 욕구)이 우선이 되고 몸의 말(신체적 반응이나 변화)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늙는다는 것은, 이 말들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과도 같다. 대체로 꼴등이었던 몸의 말은 앞자리로 오게 되고 남의 말이나 맘의 말은 그 뒤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내 기준으론 청춘시절 '남의 말> 맘의 말> 몸의 말'이었던 것이 한참 '맘의 말> 남의 말> 몸의 말'로 바뀌었었고, 이젠 '몸의 말> 맘의 말> 남의 말'이 된 거 같다. -물론 이 모든 현상들에 개인차는 있겠다. 무엇인들 아니겠는가- 어쨌든 몸의 말이 앞으로 치고 올라오고 그 비중이 한해 한해 다르게 점점 커진다는 것에는 아마 많은 중년들이 공감하리라 여겨진다. 의도적으로 그러려던 게 아니라, 저절로 그리 되었다는 것에도. 마치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우리는 늙어갈수록 몸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몸의 말'에 대한 순응은 심리적으로도 바람직하다. 실제 40-60세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신체적 알아차림, 정서적 알아차림, 인지적 알아차림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결과(송숙희, 2021)를 살펴보면 신체적/정서적/인지적 알아차림이 높을수록 덜 우울하고 심리적 안녕감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이 세 가지 알아차림 중에서도 중년 여성들의 심리적 안녕감에 미치는 기여도는 신체적 알아차림이 가장 높았다. 즉, 몸이 편할수록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보지 않았던가. 어디 아플 때 속수무책으로 번져오는 짜증, 집중 안됨, 만사 귀찮음 등등 등등. 그러니 더 자주 지령을 보내오는 '몸의 말'에 저항 없이 굴복하고 숙제와 예습을 충실히 하는 것. 편안하고 지혜롭게 늙어가기 위한 필수 과업 중 하나다.


올 여름 너의 최애 장소였던 그 베란다&빨간 슬리퍼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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