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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 공책 Jan 04. 2019

알몸에 이불을 두른 남자

어느 날 밤

  몸이다.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몸이 뜨거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해야 될 일을 미뤘을 때에 오는 찝찝함도 없었다. 단지 시간이 지날수록, 같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어도 잊고 지냈던 감각이 눈썹 안쪽에서 가슴 안쪽으로 서서히 내려올 뿐이었다. 잠옷을 벗고 속옷을 벗었다. 추운 알몸에 이불을 두른다.


  느낀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어버이에게 말했던, 무전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의 분위기가 방안에 맴돌았다. 시드니에서 타즈 마니아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을 때, 티베트에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마을을 찾아 헤맸을 때마다 온몸을 곤두세우던 감각이 알몸에 이불남의 무릎을 꿇게 만든다.


  바란다. 신이시여, 제게 꿈이 있나이다. 신이시여, 제게 꿈을 주셨나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인 것을 알기에 이불남은 무릎을 꿇었다. 다시 가고 싶나이다. 조국이 정해준 위치에서 살아가며 그 높이에서 보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싶지 않나이다. 헐렁한 옷 한 벌에 작은 가방, 난 모습 그대로 가벼운 걸음을 옮겼던 시간이, 그 느낌이 저를 잠에 이르지 못하게 하나이다. 오 신이시여.


  회상한다. 어느 날 불현듯 분쟁 지역에 가기를 원했다. 전쟁의 불꽃만 보던 아이들에게 불꽃놀이라는 이름의 순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앨범이 없는 가족들에게 소중한 시간을 기록해주고 싶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DSLR. 중형 배낭. 그 안에는 노트북과 스마트폰. 그리고 침낭. 옆으로 수통과 건조식품. 그 위로 휴대용 태양광 충전기.


  상상한다. 최소의 여비를 가지고 떠나는 길. 사진을 찍어주고 밥을 얻어먹고, 밭일을 하고 잠자리를 얻고, 낯선 길 안내를 귀동냥으로 알아듣고 헤메다가 은인을 만나는 길. 시장에 천 쪼가리를 깔고 옆 동네 과일을 파는 상인의 흉내를 내는 길. 친숙해진 풍경에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단호하게 앞만 보고 발을 떼는 길이 천장 너머로 환하게 보였다. 분명 어두운 밤인데...


  꿈꾼다. 가야 할 나라를 살피고 저가항공권을 알아보는 일상을, 언어를 연습하고 집 밥만 먹고 다니는 생활을,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풀고 익숙한 환경을 멀리하는 습관을 소망했다. 친구라는, 가족이라는, 지인이라는, 동료라는 관계의 울타리를 대빵 큰 도끼로 퍽 하고 찍어내리는 모습을 관망하고 싶었다.


  진짜 밤이 찾아왔다. 졸음이 몰려오고 한기가 올라왔다. 이불남은 조용히 누웠다. 행여나 발이 나 손가락이 이불 밖으로 나올까 잔뜩 몸을 웅크리면서, 슬쩍슬쩍 다가오는 잠을, 거부하지 않았다. 빠드득빠드득 이까지 갈면서...


작은 물줄기가 솟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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