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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 공책 Mar 14. 2018

비난을 읽는 것이 일상인 사회

개와 돼지로 불리는 사람의 이야기

  대사회와 다르게 현대사회의 인권은 신장됐다. 이것은 형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주의 국가의 합법적인 강제력은 공정한 재판의 과정. 그 후에서야 행사된다. 지나온 국가가 국익을 우선한다는 프레임으로 개인 혹은 단체를 향해 불공정한 재판의 과정과 판결을 내렸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민주 사회의 시민들은 말한다. 심증만으로 국가가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당신의 이웃인가 우리들의 마녀인가



  고대사회의 재판은 현대사회의 것과는 달랐다.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이라는 것은 대개 공정한 재판의 과정 없이 심증만으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경우에는 증인과 증인의 증언만으로 재판이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 거짓 증인과 증언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고대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투석형이라는 형벌로 목숨을 잃었다. 투석형은 고대 중동 부근에서 이루어진 형벌(물론 지금도 투석형을 집행하고 있는 소수의 국가는 있다)로, 투석형이라는 말 그대로 돌을 던져서 사람을 죽이는 형벌이었다. 형벌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으로 하여금 법을 어기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기능을 준다고 하지만 진행되는 과정은 정말 끔찍했다. 


  마을 사람들은 투석형의 대상자로 판별된 사람을 깊은 구덩이에 던졌다. 죄인으로 지목된 이는 단단한 지면에 몸이 부딪치며 찾아온 고통과 이별할 틈도 없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들을 마주해야 했다. 함께 이웃하며 살아갔던 이들이 던진 돌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떠올리는 그의 머리를 깨부수고 있었다. 가끔 날아오는 모난 돌에 옷과 피부가 찢기고 돌에 묻은 흙과 뒤섞인 핏물은 부어있을 대로 부어있는 두 눈의 시야를 가릴 때 결국 그의 의식은 돌무더기에 매장됐다.






나와 너와 우리를 엿보다



  투석형은 끝났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범법의 여부를 떠나 자신들의 손에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만 돌을 던진 것이 아니었기에.....


  가끔 기사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생각한다.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의혹을 진실로, 진실을 의혹으로 확신한다는 기사나 댓글의 모습이 꼭 고대사회의 투석형의 집행 과정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투석형을 집행했던 사람들과, 기사와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익명(투석형의 경우, 무리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돌을 던지는)과 다수라는 이유로 자신이 던진 돌에 맞은 이에 대해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아니 책임을 지지 않아도 괜찮은 거다.


  만족스럽지 않은 삶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삶의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당장 볼 수 있는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에 집중하는 것은 분명 일시적으로나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소산적 자연의 범주에 사람을 향한 비난을 포함시킨다면 이것은 논외의 비극을 불러오는 형국이 된다. 적어도 나는 이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조금만 더 이성과 의지에 호소하고 싶다.



개와 돼지로 불리는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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