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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 공책 Mar 11. 2019

자체 휴강

일상, 그 단조로움의 벽에 금이 가다

  가 아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배앓이로 화장실에 갔지만 몸에서 나오는 것은 신음뿐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속까지 뉘엿거렸다.

  비누로 손을 깨끗하게 세척했다.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의 기도를 올렸다. 아직 수건으로 물기를 닦지 않아, 비누 향이 그대로 남아있을 때 다섯 손가락을 오므렸다.

  한 손으로 변기를 붙잡고 긴 숨을 내뱉었다. 입을 벌렸다. 오므린 손이 식은 땀을 흘리며, 식도와 기도로 통하는 입 안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넘길 수 없는 이질감이 목구멍을 자극했다. 아직 부족했다. 세 번. 절규하는 표정을 뒤로하고 변기 물 위로 노란연두가 흘러내렸다.

  무엇이 모자란지 매스꺼움을 사라지지 않았고 덕분에 손끝은 피할 수 없는 감각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아픔이라면 죽는다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일상이라는 단조로움의 유리벽은, 지나가던 식중독이 던진 작은 돌을 맞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아 드디어 자체 휴강인가. 전기요 위에 몸뚱이가 뒤틀린 속을 따라 꿈틀거렸다.

  1시간이 지나고 3시간이 지나고 9시간이 지났다. 꿈과 고통과 망상에 시달리던 이가, 삶에 쉼표를 던진 배에 한 손을 얹고 다른 손을 사용해 카메라를 들었다.


기록해야 한다. 표현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를 알려야 한다. 2010년대에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고, 더 이상 같은 실수는 하지 말라고 전해야 한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아무것도 먹지 못해 비틀거리는 병자를 일으켰다.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병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사각 프레임 안으로 조금씩 빼돌릴만한 힘을 약간 얻었을 뿐이었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괜찮은가. 지성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야만 그나마 찾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숨겨진 의미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광인의 머릿속은 미친 물음에 타버릴 것만 같았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없는 이가 돌아왔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라면을 들고, 그가 돌아왔다.

  냄비에 적당히 물을 넣고 적당히 파를 넣고 라면을 끓였다. 이것도 저것도 귀찮은지 숟가락만을 사용해 라면을 먹었다. 국물을 다 마시고 스마트폰을 만졌다. 뭐 재미난 게 없는지. 세계가 어떻게 포장하고 있는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면서...



혼자 산다는 건 또 다른 성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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