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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흐레

말랑말랑

by 인디 공책
열아흐레.jpg 열아흐레 - 말랑말랑



어쩐 일인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기억의 단지가 자신의 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족족 받아들였다. 싹을 자세히 보려고 들어 올리면 흙의 무게를 버티지 못해 흙과 함께 바닥도 움푹 꺼졌다. 단단하고 늠름했던 녀석이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귀요미가 됐다.


물만 잔뜩 잔뜩 먹어서 똥배가 나온 귀요미는 지지니까 자꾸 만지면 안 되는데... 말랑말랑하니 조몰락거리기 좋아서 찌그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조심스럽게 만지작만지작거렸다. 어제까지 그렇게도 미웠던 녀석이었는데 어째 오늘은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그렇지 않아도 '청년 우울증·공황장애 무료 상담지원'에 관한 공고가 떴던데 이 기회에 상담을 받아 봐야겠다.


이별 후에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인간의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뭘 하더라도 '별'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다못해 이번에 단지가 말랑말랑해진 일만 가지고도 말이다.


'별', '별', '별''. 마음에 없는 말은 일도 하지 않고 감정 표현도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귀여운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사람이었는데, 사랑한다는 말보다 짜랑한다는 말을 좋아하고 식스팩보다 똥배를 아끼며 분위기 있는 도시적인 표정보다 바보처럼 망가진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풀'의 곁에는 없었다. 폼 잡기를 좋아하고 모든 일에 진지하기만 했던 그가 '풀'이 되었는데 '별'이 떠있는 밤하늘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말랑말랑. 말랑말랑. 말랑말랑. 속으로 이 말을 되뇌면서 '별'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진짜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깨달으면 무엇하리 '나'는 '나'대로 사랑했고 '풀'은 '풀'대로 짜랑했다. 더 이상은 잡지 않으리, 이제 서투른 사람과 서투른 사랑을 하지 않으리 다짐한다. 말랑말랑한 기억이 아무리 달콤해도 익은 사람과 익은 사랑을 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열아흐레, 긴 다짐 속에서 사랑했던 것만큼 상처를 참 많이 받았던 '나'를 드디어 인정한다. 그리고 이제 말한다.


진짜 사랑했어

그리고 지금도 사랑해

그러니까 잡지 마

익은 사람이 되기를

진짜 사랑의 감정을 알기를

다시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고 소망하고 기도하기에

그러니까 잡지 마

지금도 사랑해

그리고 진짜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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