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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디 공책 Jul 09. 2018

네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내 친구에게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를 소개하며

Frida Kahlo and Diego Rivera with monkey Fulang-Chang in 1937.


  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네게 들려주고픈 이야기가 있어. 여성시대(여시)와 쭉빵카페. 그리고 워마드에 종종 들러본다던 네게 멕시코 페미니즘의 상징을 소개하고 싶었거든. 만약 네가 그녀를 알게 된다면 그녀가 너의 삶에 큰 힘이 될 거라고생각해.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 조금 긴 이름이지. 이제 곧 네가 만날 그녀의 이름이야. 사람들은, 그녀가 그토록 배우자이길 바랐던 디에고 리베라와 그녀를 구분하고 싶었는지 그녀의 결혼 이후에는 그녀를 프리다 칼로라고 불렀대. 지금도 다들 프리다 칼로라고 불러.


  혹시 그림 좋아하니? 가끔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해. 전시회에 갈 때마다 세상을 보는 낯선 관점이 투영된 작품들로부터 신선한 자극을 받아서 좋았거든. 어휴 그런데 사실은 좋은 감정보다 안 좋은 감정이 들었던 적이 더 많았던 것 같아. 돈이 전부처럼 느끼지는 현실 앞에 감상이라는 것은 그저 배부른 사람들의 헛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았거든.


  내가 만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달랐어. 그녀의 작품을 대하며 그 속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마치 구원받는듯한 느낌이 들었었지. 프리다 칼로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고통. 그리고 그것을 대하고 있는 자신의 자세를 보여주며 나로 하여금 고통을 마주할 용기와 힘을 주셨지. 음음.


"일생 동안 나는 심각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하나는 16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이다. 두 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다. 두 사고를 비교하면 디에고가 더 끔찍했다."   - 프리다 칼로


  그녀가 가졌던 고통은 크게 두 가지였어. 하나는 사고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 그다음은 관계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이었지. 버스와 전차가 부딪치는 대형 사고로 18살의 프리다 칼로는 평생 육체적 고통이라는 속박 속에서 살게 됐어. 이일 때문에 유산도 여러 차례 겪었고 말이야. 화가이기도 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는 그야말로 불륜의 화신이었어. 이성에서 동성까지 그의 스펙트럼은 바다처럼 끝을 보이지 않았지.


  프리다의 진짜 고통이 뭔지 아니? 프리다는 자신의 남편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어. 본인이 생각해도 자기가 디에고의 배우자로서 너무 아까웠던 거야.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프리다가 더 미치고 환장할 사실 하나를 알게 되지. 그런 디에고라고 할지라도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 거야. 이건 정말...... 후...... 하......


  나는 내가 살아있는 프리다 칼로를 만날 수 없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죽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분명 그녀는 안식 중에 있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나는 그녀를 응원해.


  세 치 혀로 프리다를 네 앞에 보이게 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가지 네게 프리다의 위대한 점만은 꼭 알려주고 싶어. 현실에서 프리다는 여성, 장애, 고통, 멕시코,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에 강제로 갇혀서 살았어. 하지만 그 사람은 모든 프레임을 거부했어. 프리다의 작품들이 그 증거야.


  나는 내가 타자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쉽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런 글을 싸지르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가 봐. 실망하더라도 미안. 그래도 난 너를 친구라고 생각할게. 안녕. 사요나라. 굿바이. 비스 모르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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