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HD
그에게 꽤나 긴 편지를 썼다. 그가 발행인으로 낸 책을 잘 읽었으며 많은 감명을 얻었다는 독후감 같은 것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의 출판사 B에서 낸 문고판과 신서 시리즈의 목록은 다양한 범주의 작품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다. 소년 시절의 나는 그 작품들을 접하면서 채워졌다고도 할 수 있다.
편지를 보낸 얼마 후 그는 내게 답장을 보내왔다. 어떤 내용이었는지 딱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보내준 글에 대한 감사와 격려의 내용을 엽서 같은 데 쓴 것이었고 B출판사에서 계간으로 내고 있는 독자 대상의 홍보잡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계간지 B에는 내가 보낸 글이 실려 있었다. 한동안 나는 그 계간지를 간직했다. 그 후로도 나는 B출판사에서 나온 고전 시리즈들을 즐겨 읽었지만 더 이상 독후감을 보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자사에서 수필집 한 권을 냈다. 그의 프로필에 의하면 그는 내 부친이 재직 중인 대학의 전신인 모 고등전문학교를 나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후에 그는 모교에 그가 평생 모은 책 3만 여 권을 기증했다. 내가 그의 후배가 될지 그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황금밝은돌을 만나 사귀었는데 그 역시 B출판사의 여러 책들을 즐겨 읽은 사람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들로 그와 나는 만날 때마다 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서로에게 책 선물도 했다. 아마 지금도 그는 B사의 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쉽게 가지지도 버리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아직 HD는 생존해 있는 듯하다. 팔순이 넘은 나이일 것이다. 그의 수필로 받은 인상에 따르면 그는 꽤나 절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아직 건강할 것이다. 그가 아직도 출판사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의 출판사에서는 고전을 중심으로 책을 내고 있다. 내 유년을 채운 출판사에 계몽사와 계림 출판사를 꼽을 수 있다면 소년 시절에는 B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출판사의 책들이 내 인생을 수놓았고 영향을 끼쳤지만 B출판사를 빼놓으면 맥락이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사를 갈 때마다 나는 고민하였다. 이미 낡은 B사의 책 몇 권을 버릴 것인지 다시 챙겨갈지를. 결국 나는 책 표지를 깨끗이 닦고 먼지를 떨어낸 뒤 서가에 다시 꽂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