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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Dec 28. 2018

밀짚모자

피리부는 다람쥐 장수

그러니까 뭐랄까,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듯한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낚싯대를 메고 나타난 것은
어느 초여름 오후였다.


우리 동네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봉화산 서쪽은 절벽이었다. 그 앞으로 철길이 나있고, 철길 가까이로 키 큰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있었다. 철길과 우리 동네 사이로는 동천이 흘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 하나는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는 것, 다른 하나는 동천 한가운데로 난 물막이 제방을 타고 건너는 것이었다. 장마철이나 큰 비가 온 뒤에는 제방 둑 위로 걷는 건 위험천만했다. 지금이야 차로 2-3 분이면 건너는 거리지만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겠지) 저학년 시절에는 우리 동네서 빤히 뵈는 곳이긴 해도 백여 미터 되는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철길까지 가는 건 먼 길일뿐 아니라 두려운 일이기조차 했다.


그는 우리가 노는 곳으로 슬그머니 다가와서 쳇바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다람쥐 두어 마리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기 뵈는 저 절벽 아래 미루나무 숲에 가면 이런 다람쥐가 많다고, 그리고, 낚싯대로 다람쥐를 잡는다고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람쥐가 돌리는 쳇바퀴를 보다가 밀짚모자 아저씨를 쳐다보곤 했다. 처음 보는 아저씨 말을 믿고는 싶었지만 왠지 무서웠고, 아저씨가 은근히 미소를 띠며 우리를 꾀는 것이 어딘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뵈기도 해서 아무도 따라나서는 아이는 없었다.


그는 한 동안 우리에게 다람쥐를 보여줬다가, 저 멀리 뵈는 봉화산 절벽을 손가락질하기도 하다가 반응이 시원찮자 그만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다리 쪽으로 사라졌다. 우리 중 몇은 기찻길 선로 위에 대못을 올려 두고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기차 바퀴에 깔려 선로 위에 납작하게 펴져 있는 대못을 숫돌에 갈아 허접한 모양의 주머니칼을 만든 녀석도 있었다. 녀석들이라면 다람쥐가 널렸다는 그 미루나무 숲 근처를 가본 아이도 있었을 게다.


어디서 돈이 났는지 모르지만 다람쥐 장수에게 얼만가를 주고 다람쥐를 산 녀석들도 있었다. 다람쥐가 그 뒤에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유럽의 전래 동화에 보면 피리 부는 떠돌이 사나이가 나오는데, 자신을 홀대한 마을에 밤에 찾아가 이상한 곡조의 피리를 불어 잠든 아이들을 모두 꾀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다람쥐 장수 아저씨가 혹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어 은근히 불안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가본 철길 근처에는 미루나무 숲이 없어지고 대신 이런저런 집들이 들어섰다. 비포장도로였던 선로 옆길은 잘 포장되어 자동차가 오갔고 콘크리트 다리는 생각보다 짧았다. 도대체 다람쥐를 잡아서 어디에 썼던 걸까? 다람쥐 가죽으로 목도리나 장갑 따위를 만들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주워서 볼이 미어터지도록 담아오게 길들였던 걸까? 아무래도 이유를 모르겠지만 그 다람쥐 장수는 그걸로 돈벌이를 했다니 재주가 기가 막히다. 대부분 멋모르는 아이들의 코 묻은 돈 아니었을까? 어쨌든 봉화산 서쪽 절벽을 바라볼 때마다 그 밀짚모자 아저씨가 생각난다. 밀짚모자 그늘 아래로 얼굴도 드러나지 않은 실루엣이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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