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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명 이영주 Jan 08. 2019

주암댐

K 누나

갈래 머리를 땋아 내린 여고생 시절부터 알고야 지냈지만 제대로 이야기를 하게 된 건 그녀가 음대에 입학하고 내 피아노 선생이 된 뒤부터였다. 어머니는 내게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했고 그녀는 내게 체르니 100번이라든가 그 수준의 곡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피아노를 잘 쳤지만 잘 가르치는 편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된 뒤 나는 그녀의 어머니 G 여사에게 일본어를 배웠다. 한동안 새벽에 배웠고 나중에는 밤에 배웠다. 여사 댁은 옛날 일본 철도원들이 살던 집이었다는데 초록색 현관문은 유리문이었다. 런던에 있는 빨간 공중전화 문처럼 생겼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현관이 있고 다시 비슷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야 마루가 나왔다. 거실이랄 것도 없이 일본식 다다미가 깔린 집인데 고양이를 키워서 고양이 냄새가 늘 났다. 거실에서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일본어를 배우는 식이었는데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느냐며 그녀는 슬그머니 나와 함께 배우기 시작했다.  


아침 시간에 일본어를 배울 때는 다들 바빠서 공부만 하고 헤어지곤 하다가 나중에 여사께서 사정이 생겨 저녁으로 시간을 옮기게 되자 한 시간 가량 공부를 마치고 나면 나는 K누나와 함께 차도 마시고 이런저런 음악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그녀로부터는 오페라 레코드를 빌려 오고 나는 바이올린 레코드를 빌려주고 하면서 가져간 레코드를 함께 듣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다가 그녀의 애인 P와 커피도 마시고 드라이브도 하고 그랬는데, 그의 대학 선배 바이올리니스트 NS를 소개받게 되었다.


어느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그녀와 P는 나와 내 애인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 즉 G 여사는 사모, K누나는 반주자, 나는 성가대 지휘를 맡았다. P는 가끔 그녀를 만나기도 할 겸 예배에 참석했다.) 도착한 곳은 어느 시골 마을.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따라 먼지를 풀풀 날리며 한참을 달린 후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 한 작은 교회 마당에 차를 대고 내렸다. 멀리 벌판 위로 까마득히 높은 고가도로가 지나고 있었다. P는 말했다.


우리는 지금 곧 물에 잠길 동네에 와 있는 거야. 말하자면 물속에 있는 거라고. 댐 공사가 끝나고 저수를 시작하면 저기 보이는 고가도로 아래까지 물에 잠기는 거야. 여기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다들 떠나고 있다고.


기분이 묘했다.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숨쉬기가 힘들고 허파 속까지 물이 들어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뒤 다시 그녀와 P, 나와 애인이 각각 커플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사진은 지금도 작은 액자에 담겨 책상 위에 놓여 있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애인과 내 뒤로 고가도로가 달리는 사진이다. 주암댐 물이 차오른 뒤로 그곳에 다시 가본 적은 없다.


그 뒤 P가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나와 NS 그리고 K와 P는 진주로 갑자기 드라이브를 간 적도 있다. 섬진강 휴게소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섬진강 재첩이 곧 제철이라는 둥 그런 이야기를 했다. 진주에 가서 뭘 했는지는 또렷하지 않다. P가 군 복무를 마치자 그녀는 P와 결혼을 했고 나는 애인과 함께 신혼집 구경을 갔다. 또 얼마 뒤 그녀가 아이를 낳자 아기를 보러 갔다. P가 레지던트를 마치고 대학병원에 남자 그녀는 그가 있는 곳으로 전근했다. 그 후로 간혹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다.


한참 후 이삿짐을 꾸리다가 그녀가 녹음해 준 오페라 카세트테이프가 나왔고, 그 사이 우리가 갔던 시골 마을은 물에 잠기었다.



(사진출처: 한국수자원공사 전남지역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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