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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Sep 01. 2022

수험서와 함께 한 마지막 날

수험서, 그 익숙한 것과의 결별

  카드값을 낼 날이다. 이번 달은 돈 나갈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카드 대금이 통장 잔고보다 몇만 원 더 나온다. 온 방을 다 뒤져서 굴러다니는 동전까지 끌어모았지만 그래도 돈이 부족하다. 다시 한참 방안을 두리번거리다 책장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책장 속 빼곡한 책 가운데는 천 페이지가 넘는 책들이 꽂혀 있다. 마지막 펼쳐본 게 언제였지. 아마 앞으로도 열어볼 일이 없을 내 수험서들.      

  

  책을 책장에서 빼내 수직으로 쌓아보니 내 키를 훌쩍 넘을 기둥 몇 개는 만들 수 있겠다 싶었다. 책이 빠진 빈 책장을 보니 선반은 무게에 눌려 휘어있었다. 휜 책장을 보면서 그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를 생각했다. 수십 킬로그램은 될 법한 무게를 긴 세월 버텨냈으니 휠만도 하지. 내 허리 디스크가 괜히 생겼던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책장도 나만큼 힘들었구나. 게다가 더 오래 힘들었구나.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허벅지에 맷돌을 올려놓는 것 같은 무거운 고통이 몰려올 때가 많았다. 하지만 하루 공부할 분량을 끝내기 전까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몰랐다. 이 고통이 디스크의 전조 증상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공부한답시고 의자에 앉아 시나브로 허리를 부수고 있었다. 나만 아픈 줄 알았는데 책장도 나와 함께 아파하고 있었다. 완전히 빈 책장과 쌓아놓은 수험서들을 보면서, 내 인생에 시험이란 게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들을 헐값에 중고 서점으로 보내서 단돈 얼마라도 챙겨보려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으나 보내는 수고와 택배비를 생각하니 영 보람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수험서는 합격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람을 찾기 힘든 일인데 고작 이걸 팔아서 몇 푼이라도 벌어보자는 생각 자체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카드값은 오늘까지 내야 한다.      


  한 권당 적지 않은 가격을 줬음에도 고물상에 가져가면 kg 당 천원도 되지 않는 원 재룟값만을 받을 수 있는 수험서들. 그것도 굳이 고물상까지 끌고 가는 수고를 해야 그나마 그 값도 받을 수가 있다. 왠지 값있게 쓰지 못했다는 생각에 책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혹시 책 안에 누런 신사임당까지는 아니어도 퍼런 세종대왕 정도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 두꺼운 책들을 하나씩 다 확인해봤다. 그런 소소한 행운 같은 것은 이 많은 책 가운데 단 한 장도 숨어 있지 않았다. 신사임당과 세종대왕은 그저 한국사 수험서에 인쇄된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수험서와의 이별은 마지막까지 이렇게나 모질다.      

  

  이 책들과 세상 가까웠던 시간이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때는 이 책들과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벌써 낯설다. 책은 그렇게 이미 나와 멀어져 있었다. 다시 들여다본 책에는 한 장 한 장 내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책에는 필기하고 문제를 푼 흔적이 가득했다. 책에 적힌 글씨에서 시퍼런 슬픔이 배어 나온다.       

  

  인생의 적지 않은 시간을 퍼부었던 피부 같던 수험서와 나는 오늘 헤어진다. 길고 길었던 수험 끝에 남은 건 고물상에 끌고 가야 할 산더미 같은 책들과 일자목에 굽은 등, 디스크 병력, 그리고 불어난 체중뿐이었다.     

 

  수험서와 이별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나 헤어지는 날만은 미루고 미루어 왔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느닷없이 결별하리라고는 생각지 몰랐다. 책을 열댓 권씩 모아 노끈으로 동여맨다. 그렇게 지금 수험서들과 결별하는 중이다. 끙끙대며 한참을 씨름한 끝에 책들을 모두 노끈으로 묶어 모았다. 이제 고물상에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가기 전에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커피는 내내 쓰다가 바닥 언저리쯤에서야 달다.



이미지 출처_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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