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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Oct 24. 2022

명품백이 싫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의 시간은

  생일 전날 밤 기차역에 갔다. 청량리역에서 늦은 밤 탈 수 있는 기차를 보니 경포대에 가는 것이 있어서 가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볼 수 있다. 경포대는 청량리에서 꽤 멀었고 기차 의자 두 칸에 몸을 구겨 넣고 잠을 청했다.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다 보니 경포대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새벽 세 시였다. 찜질방에서라도 잠을 청해볼까 했지만, 왠지 혼자 하는 숙박은 무서웠다. 그렇게 역에서 경포대까지 택시를 탔고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밤을 새우기로 했다. 생일날 도망치는 신세라니. 

     

  만나던 오빠가 생일날 명품백을 선물로 주겠다고 한 달도 전부터 말한 거 같다. 근데 그때 명품백보다는 얼굴 마사지기가 갖고 싶었다. 가격도 1/3도 안 된다. 마사지기 사달라니까 바로 거절당했다. 더 싸고 명품백보다 더 원하는 건데 왜 안 사주냐고 하니까 내가 비싼 가방을 들어야 옆에 있는 자기가 능력 있는 남자로 보인다고 말했다. 의아했다. 생일 당사자인 내가 기쁘지 않고 주는 본인만 기쁜 선물을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투자하는 돈이라며 만날 때 쓰는 데이트 비용과 더불어 차 기름값과 본인 입에 들어간 음식값까지 계산하는 남자였다. 저 백을 받는다면 혼수 가방만 미리 땅겨준 거라며 결혼해달라고 드러누울 거 같았다. 만나기야 만나지만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 좋다고 하니 만나다 보면 좋아질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오빠는 그저 자기 자신을 좋아했던 거 같다. 잘난 척을 거들어 줄 상대가 필요했던 걸까. 내 감정이 커지지 않은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보낸 감정대로 누군가에 대한 감정이 생길 때가 많았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적잖게 그럴 때가 있었다.      


  그 오빠가 준비한 생일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치가 아파질 거 같았다. 하지만 휴일이면 아침부터 우리 집 앞에 차 대놓고 깰 때까지 전화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아예 집을 나가는 걸로.     


  그렇게 뜬 눈으로 경포대에서 밤을 새웠다. 칠흑 같은 어둠 사이로 날이 조금씩 밝아오는 그 모습을 모두 보았다. 해가 다 떠오른 바다 주변의 공기는 부드럽고 포근했다. 집이든 직장이든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시달려온 나를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것 같았다. 평온한 기분을 느끼며 바닷가를 오래 걸었다. 대자연 속에서 나는 사람 때문에 고달파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 나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발걸음 사이에 걸린 조그만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순두부찌개가 밤샘 피로를 적잖게 녹여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조금 이따 아니나 다를까 그 오빠 문자가 왔다. 예상은 했지만 헤어진 마당에 정말로 집 앞에 또 올 줄은 몰랐다. 지방이고 지금 서울에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답한 후 더 이상 답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때 답하고 바로 차단했고 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외로움에 잠시 사람을 찾아도 봤지만 공허할 뿐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귀지도 결혼하지도 않겠다고 말이다.     


  생각보다 나는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같이 시간을 보내도 그 시간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과거에는 좋아했어도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사람과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소개팅 나가면 최소 맛있는 밥은 먹는다며 잘도 나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고 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몸에 축적되는 지방 빼고는 남는 것이 없었다. 내 시간을 내 인생의 일부분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내어주는 일은 이제 없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 정말로 내가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지 출처_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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