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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Sep 29. 2022

품위 없는 이별

아름답지 못한 마지막 모습

  인터넷 광고를 보고 가정집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업체에서 받은 주소지를 찾아서 청소를 의뢰한 집으로 향했다. 연락을 늦게 받아서 지하철을 타면 혹여라도 늦을까 싶어서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가 되지도 않는 질펀한 농을 치는 것도 모자라 엉뚱한 곳에 내려주었다. 그 바람에 되레 더 늦고 말았다. 정말 여러모로 나쁜 인간이었다.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웠다.      


  썩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날이 흐려지더니 비도 몇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늦은 건 어쩔 수 없고 남은 하루 별다른 일이 없었으면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나가봐야 한다고 하길래 급하면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가라고 했지만 남자는 한사코 기다려서는 내 얼굴 확인하고서야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눌한 말투에 눈빛이 연신 흔들렸다. 인사를 나누자마자 비밀번호를 알려주고는 그 남자는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30분이나 기다렸으면 문만 열어주고 가는 게 자신의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직접 알려줄 거였으면 바로 나가봐야 하는데 뭐 하러 나를 기다린 건가 싶었다. 뭔가 싶어서 연신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그려냈지만 나는 지금 돈을 벌러 온 것이다. 청소할 때 크게 생각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잠시 생각은 접어두고 그 남자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눌러서 문을 열고 그 남자의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남자의 집 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집안 모습이 섬찟하다. 프린터 잉크가 프린터가 설치된 방을 넘어 거실, 옆방, 주방, 그리고 벽지 곳곳까지 온 사방에 흉측할 정도로 엎어져 집전체가 난리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프린터 잉크를 엎을 수 있나 싶었다. 여기저기 집안 곳곳 엎어져 있는 잉크와 얼룩들은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는 거 같았다.     


  전화로 그 남자가 프린터 잉크를 심하게 엎질렀다는 얘기는 도착하기 전에 들었을 때, 일이 힘들겠구나 싶었지만 지우는 데까지만 지워달라고 해서 완벽하게 안 지워도 하는 데까지 하면 되겠지 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직접 와보니 눈앞의 현실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완벽하게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직접 그 꼴을 보니 착잡했다. 업체에서는 청소가 힘들 정도로 심한 곳은 거절하고 나와도 된다고 안내해줬는데 일진이 사나워 30분이나 지각했고 그런 나를 기다리면서 늦은 것에 대해서는 나무라지도 않았기에 뭔가 미안해져서 사죄하는 심정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의외로 잉크는 생각보다 잘 지워졌다. 다만, 끈적하고 한 번에 다 닦이지 않아서 여러 번 닦아야 했다. 잉크는 미적지근하고 불길할 정도로 끈적거렸다. 잉크를 지우다 걸레를 몇 개는 버려야 했다. 엎어진 잉크는 분명 검은색이었는데 걸레에 묻어난 잉크에는 희한하게 붉은 기가 돈다. 막상 청소해 보니 도배만 새로 하면 될 거 같았다. 이불도 버려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정도면 표백제로 지워서 쓰면 될 것 같았다. 동전만 한 얼룩이 몇 개 보였을 뿐이었다. 청소를 해보니 막상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고 주방 그리고 거실로 자리를 옮겨 청소하다가 탁자 위에 노란 종이를 발견한다. 데이트 폭력에 관한 경찰 안내문이었다. 안내문에 적힌 연락처를 보니 그 남자의 것이 맞았다. 그 남자는 나와 동갑이었으며 연인과의 쌍방폭행과 스토킹을 한 혐의로 그 안내문을 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이 집 비밀번호가 떠올랐다. 6969였는데 생일이나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숫자일 수도 있겠으나 이 안내문을 보자니 괜히 불순한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화장실이며 방이며 부엌 아닌 곳에서 식칼과 무자비하게 잘린 머리카락들이 자꾸 나오니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한 번 부르면 계속 부를 가능성이 크다고 업체를 통해 들었는데 또 부르면 가지 않아야겠다고 그때 결심했다. 잘못 걸리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큼직하게 지저분한 걸 다 치우고 난 후 자잘한 걸 치우기 시작했다. 그 남자 방 책상에는 쪽지가 있었다. 쪽지에 적힌 필체로 미루어보아 여자 글씨였다. 그 글씨는 흡사 눈물을 머금은 듯 보였다. 쪽지에는 ‘시험 꼭 합격하고 잘 살아’라고 적혀있었다. 책상 주위를 둘러보니 보험 관련 자격증 수험서가 즐비했다. 보험상품 설명서도 잔뜩 있었다. 그 여자 말대로 시험 합격하고 잘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남자는 그게 잘 안됐나 보다.     


  그들도 사랑할 때는 이런 결말일지 몰랐을 것이다. 사랑을 나누던 서로가 폭력을 나눴으며 법적 분쟁만이 남아있었다. 가히 파국이었다. 안내문도 쪽지도 서랍 안에 넣어두었으면 볼일이 없었을 것이다. 특히 쪽지 주변에는 쓰레기들이 범벅이어서 버릴 물건과 버리지 않을 물건을 골라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 사람 사생활 일부분을 굳이 보고야 말았다.     


  둘이 하던 사랑이 더 이상 둘이 하는 사랑이 아닐 때, 사랑했던 기억만큼은 아름다울 수 있게 상대방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해주는 것 또한 사랑에 포함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더더욱 말아다. 진정 위한다면 보내 줄 줄도 알아야 했는데… 자신의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고 떠나겠다는 사람을 놓아주지 않고 폭력까지 행사한 그 모습에는 사랑이란 게 없어 보였다. 사랑도 없었지만 일말의 품위도 없었다. 이러려고 사랑한 것이 아닐 텐데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소설 속에만 있는 건지.     


  일이 끝나갈 때쯤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과한 시간에 대해 내가 받을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주겠다고 하고 계속 주기적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내문이 탁자 위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업체를 통해서 부르면 수수료가 나온다며 개인적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순간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은 알겠다고만 말하고 더 말하지 않았다. 거절에 굉장히 민감한 타입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최대한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청소를 끝냈고 며칠 뒤 청소 상태에 대해 엉뚱한 트집을 잡는 문자가 왔다. 전선에 잉크가 묻어 있다며 불평했다. 분명 전화로 완벽히 치우는 건 바라지도 않았던 사람이고 바닥에 있는 거 전부 다 버린다고 했던 사람이 말이다. 전선은 바닥에 있던 물건 중 하나였고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전선에 묻은 잉크까지 다 지워서는 그날 안에 일이 끝나지 않았다. 이게 트집 잡을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치부를 들키고는 엉뚱한 데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돈도 이미 다 줬고 따져 묻는다고 천 원 한 장 돌려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맘에 안 들면 그냥 다시 안 부르면 그만 아닌가. 조금 의아했다.     


  마지막 모습이 깔끔하지 못한 건 비단 연인관계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길게 말을 이어 나가지는 않았다. 그 남자 집에서 본 데이트 폭력 안내문과 더불어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던 식칼과 머리카락들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일을 마지막으로 청소 아르바이트를 다시 가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그 남자에게서 또 일하러 와달라는 전화가 왔다. 이 사람 분명 청소 상태를 타박했었다.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찝찝하고 곤란했다. 내 머릿속에는 안내문의 내용이 아직 선명했다. 그래서 다른 일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그 일회성 고용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깔끔한 마무리를 했다. 왜 전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이상한 사람이다.     


이미지 출처_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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