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깜빡 건망증

타인의 실수를 보고 누가 웃을 수 있을까?

by 나를 아는 사람

김치통은 주인을 만났을까. 저녁 식사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1층에 도착했을 때 남편과 나는 묵직한 김치통 한 통을 만난다. 문이 열리자마자 문 앞을 정중히 지키고 있는 김치냉장고용 김치통을 마주한다. 김치통 안에는 김치가 한가득 채워져 있다. 웃음 터진 우리 부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김치통을 뒤로하고 음식점으로 향한다.


식당에서 삼계탕을 먹는 중에도 온갖 신경이 조금 전에 아파트 엘리베이터 문 앞에 있던 김치통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신경이 쓰인다. 김치통 가까이 가서 허리를 약간 숙여서 내려다보니 김치통 안에 비치던 싱싱한 김치의 모습에 아삭하며 시원한 맛까지 상상이 간다.


삼계탕과 함께 먹으면 참 맛있겠다는 생각.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파트로 걸어왔을 때 김치통은 아직도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김치통 양쪽 손잡이는 누군가 차에서 바로 들고 내려 옮긴 뒤 또다시 이동해야 할 듯 위로 손을 번쩍 들고 있다. 남편 말로는 저 모습으로 점심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팔이 아파도 한참 아플 것 같은 모습으로. 반나절은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킨 셈이다. 보기만 했는데도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분명 누군가 짐을 옮기는 도중 깜빡하고 놓고 간 것이 짐작되었기 때문에. 김치는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익어가며 밤을 지새울 것 같다. 김치통이 자꾸만 “날 좀 데려가시오” 하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김치통을 보며 누군가의 건망증을 떠올린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라며 서로 그럴 수 있다고 합리화를 시킨다. 그 누군가의 작은 실수에 그저 웃는다. 우리가 가야 할 층수를 누르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깨닫는다. 우리 부부 또한 깜빡깜빡하고 있다.


건망증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증세가 아닐까 하는 개인적 생각이 든다. 그 건망증으로 인하여 있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날은 아이들을 위해 큰 맘먹고 서로의 날짜를 맞추어 경남 고성에 공룡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사천에서 사오십 분이면 도착하는 곳. 가깝지만 어쩌다 보니 자주 가지 못해서인지 아이들은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공룡 볼 생각에 들떠서 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 번졌다. 남편도 나도 덩달아 신나고 좋아서 기쁜 마음으로 가는 중이었다.


차 안의 즐거운 공기를 한순간 멎게 한 것은 나였다. 고성군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저 앞 도로변에 공룡의 조형물이 모습을 살짝 보여줄 때 바로 그때였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생각난 것은, 그것은 바로 가스 불 위에 보리차 끓이던 솥, 무쇠로 만들어진 내가 좋아해서 자주 사용하는 솥.


어쩌나 싶었다. 왜 하필 여기서 이것이 생각나는 것인지.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 솥이 까맣게 타고 집에 불이 난 장면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스 불에 물 끓이고 있는 것을 깜빡한 것 같아” 이 말을 들은 남편과 아이들은 어떻게 그걸 깜빡할 수 있냐며 투덜댔다.


코앞에 공룡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제부터 종류별 공룡 모습을 다 볼 수 있는데. 차를 돌리는 남편과 아이들은 나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고성에서 다시 사천까지 오는 동안 차 안의 공기는 냉랭했다. 혹시라도 집에 불이 났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삼십 여분의 시간이 흐른 뒤 우리 집에 도착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주방으로 향했다. 가스 불 위에 물을 끓이던 솥 주변에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뚜껑을 열자 연기와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솥의 바닥에는 물은 거의 없고 반쯤 타고 남은 보리차만 남아 있었다. 다행이었다.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다행히 보리차가 다 타기 전에 집에 도착했으니 말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가족들 나 때문에 일정을 망쳤다고 엄청나게 불만을 표출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번 남편과 아이들은 내게 가스 점검했는지, 문의 잠금 상태는 확인했는지, 등등 혹시나 하는 마음에 또 실수할까 봐 잔소리만 잔뜩 늘었다. 다음부터는 실수하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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