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네가 있는 곳에 우리가 있어
가족 말이야
서울엔 자신의 꿈을 찾으러 떠난 큰 딸이 있다. 남편과 나의 반대를 물리치고 가더니만 보란 듯이 서울 토박이처럼 당당하게 잘 살고 있다. 영어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어도 외국인과 능청스럽게 대화는 잘하고, 잘 웃고 세상 돌아가는 정보 습득이 빠르다. 거기다 센스까지 있어서 찾는 사람이 많다. 낯선 곳에서 나름 인맥을 쌓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 어딜 가든,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 넘치고 자기애가 강하며 당당하게 살아간다. 큰 딸의 일상은 흐린 날 보다 맑고 청정한 날이 많다.
4년 전. 서울에 처음 4평 남짓한 원룸에 큰 딸을 남겨 두고 고향 집으로 내려오는 날. 차 안에서 우리 부부는 말이 없었다. 남편의 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결국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남편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평소 말이 없고 표현력이 약한 남편의 눈물은 미안함이 담긴 표현이라 그 눈물의 의미가 깊었다.
큰 딸을 조금 더 넓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지만 우리 집 형편상 그럴 수가 없었다. 남편은 평소 큰 딸에게 무심한 듯 행동한다. 관심이 없는 척 하지만 실제로 우리 가족 중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임을 안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큰 딸 요즘 어찌 지내?' 하며 나에게 묻는다.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 보라고 해도 전화를 하지는 않는다. 내가 전화를 해서 큰 딸과 통화를 하면 눈은 티브이를 보고 귀는 나의 통화에 바짝 몰입해 있다.
남편은 큰 딸 생일이 되면 서울에 가자고 하고, 딸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서울 가자고 하고, 큰 딸이 우리가 가 보지 않은 멋진 장소가 있다고 하면 그 핑계로 서울에 가자고 한다. 결국 보고 싶은 딸의 얼굴도 보고, 원하는 것을 해 주기 위한 것이란 걸 안다. 못 이긴 척 난 무조건 오케이다.
우리 가족은 평소엔 아끼고 절약하며 소비를 줄이지만, 서울에 가서 큰 딸과 만나면 비싸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넓은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맘에 들면 구매도 한다. 전시회도 가고 덤으로 내가 좋아하는 파주에 있는 '지혜의 숲'에도 간다. 시간이 갈수록 서울에는 우리가 좋아하고 자주 가는 장소가 많아졌다. 우린 관광지를 구경하기보다 주민들 사이에 끼여서 동네 사람인 듯 지내는 걸 좋아한다. 큰 딸의 주거 활동 지역인 합정동, 망원동, 서교동 일원이 이젠 정이 들어 우리 동네처럼 편안하다. 골목골목 샛길을 잘도 찾아간다.
주로 아침에는 한강공원, 하늘공원, 성미산에 가서 운동을 하고, 낮에는 교보문고, 알라딘 중고서점, 책 발전소에서 시간을 보낸다. 밤에는 망원시장에서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시장 구경을 한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시장에서 파는 과일이나 채소의 가격에 놀라고 늦은 시간까지 북적대는 사람들의 모습에 더 놀란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음식도 소량 포장이 많음을 알았다.
매번 우리 가족 넷이 모이는 첫날밤이 되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의 즐거웠던 기억 때문이다. 테이블이 몇 개 없는 맥주를 파는 작은 술집이다. 그 집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마주 보는 사람의 얼굴이 부딪칠 것 같다. 마른안주 종류인 가문어를 시켰는데 너무 작은 양에 우린 속닥거렸다. '에게, 이게 뭐야?' 할 말을 잃었다. 문어 다리 한 두 개. 가위로 최대한 잘게 잘게 잘라서 먹는데 재밌기도 하고 웃겼다. 우리는 웃고 떠들며 가문어 다리를 몇 번이나 시켰는지 모른다. 맥주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아주 작은 술집과 가문어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음식점의 대부분은 큰 딸이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큰 딸은 곰탕집, 막창집, 고깃집, 누룽지 삼계탕집에 우리를 데리고 간다. 본인이 앉았던 자리의 위치도 가르쳐 준다. 맛있고 새로운 음식을 먹고 나면 가족이 생각나는 큰 딸. 큰 딸은 남편을 닮아서인지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잘하지 않는다. 가끔 누군가 말 끝에 감추고 있던 어떤 것을 툭 건드리면 감정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는 것 빼고는. 그럴 땐 울어야 된다. 감정의 찌꺼기가 다 씻겨 나가도록. 강한 척 하지만 사실 마음이 여리고 정이 많다.
우린 딸이 평소에 어떤 음식점에서 어떤 한 끼를 먹고, 어떤 카페에서 어떤 차를 마시는지 안다. 마트는 어딜 가고, 원룸에서 늘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쁜 꽃은 어디에서 사고, 시골 밥상 같다는 김치찌개는 어디서 먹고, 남기지 않아도 되는 반 마리 통 닭은 어디서 사 먹고, 빨래방은 어디를 가는지, 머리카락을 자른 듯 만 듯, 파마를 한 듯 만듯하게 해 준 미용실은 어디에 있는지 안다.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껍질을 벗겨 썰어 놓은 과일은 어디에서 주문해 먹는지, 딱딱한 '하모니콘' 이라는 과자를 살 거라며 몇 군데의 편의점을 다녀왔는지도 안다.
길을 가다가 이상한 사람이 쫓아와 급하게 들어간 곳이 어디인지, 힘겹게 박스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준 얘기까지 우리 가족은 같이 있지 않아도 늘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숨 쉬고 있는 듯 지낸다. 큰 딸이 얘기만 하면 그곳이 어딘지, 어떤 느낌인지, 분위기는 어떤지, 맛은 어떻고, 양은 얼마나 되는지, 어떤 날에 가야 더 좋은지 우리 가족은 안다.
큰 딸이 좋아하는 장소를 순회하며 지내다 시계를 보면 금세 고향집으로 갈 시간이 된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매번 아쉬운 1박 2일을 하고 고향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 가족의 헤어짐은 어설프다. 서울에 남겨진 큰 딸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눈을 피하며 작별 인사를 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큰 딸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 꾹 참고 짧은 인사를 하고 서둘러 차에 탄다. 고향 집에 도착해서 하루만 지나도 전날 만남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보고 싶어지는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