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거절은 어려워
열무 조금 얻으러 갔을 뿐인데
회사 언니 아버지께서 열무를 심으셨는데 판매할 곳이 없다는 얘기에 팔아 드릴 겸 해서 퇴근 후에 언니 집으로 가기로 했다. 언니는 친정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마트에서 언니네 아버지께 드릴 녹차 카스텔라 빵 하나를 샀다. 처음 가 보는 길인 데다 운전이 아직 능숙하지 못해서인지 도착하기도 전에 주차할 생각에 걱정이 생겼다. 언니가 앞장서고 난 그 뒤를 따라갔다. 마을 길 입구에는 신축 원룸과 커피 공방이 새 것임을 확인해 주듯 시골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피 향과 포스를 솔솔 풍겼다.
구불구불 마을길은 운전을 배울 때 힘들었던 S코스를 돌아가는 느낌이다. 언니가 벽을 조심하라고 미리 알려 준 이유를 알 것 같다. 폭이 좁은 모퉁이를 또다시 돌아갈 때 오토바이를 탄 마을 어르신과 마주쳤다. 난 그대로 멈춰 섰고, 어르신은 나의 작은 승용차를 조심스레 비켜서 겨우 빠져나갔다.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서 동네의 끝을 알리는 듯한 넓은 공터가 나왔다. 언니네 대문 앞마당이자 동네 주차장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언니 아버지께서 미리 뽑아 둔 가늘고 부드러운 열무를 언니는 큰 봉지에 한가득 담아 준다. 많다고 해도 김치 담가서 두고두고 먹으라며 많이 싸 준다. 언니는 창고에서 녹슨 낫을 하나 집어 들더니 집 옆에 있는 텃밭에서 열무 물김치 담글 때 넣으라며 부추를 자르고, 쌈 싸 먹으라며 드문드문 자라고 있는 취나물과 쑥갓을 자른다. 창고 옆 귀퉁이에서 고기 없이 된장과 상추만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 부드러운 상추도 밑동을 툭툭 꺾는다. 마트에서만 보던 아욱도 툭툭 한 잎씩 딴다. 아욱은 시금치처럼 땅바닥에서 자랄 줄 알았는데 깻잎 나무처럼 위로 자라는 줄기 사이사이에서 한 잎씩 딴다. 싹이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방앗잎도 낫으로 베어낸다. '이렇게 잘라줘야 방아가 더 퍼지면서 잘 자란다'라고 한다. 난 텃밭에 있는 다양한 채소들의 맛과 향을 체험하듯 바로 떼어 낸 푸른 잎 본연의 향을 맡아본다.
언니 집에 온 김에 언니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취미 활동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대문을 들어서는데 빨간 앵두가 담장 너머로 살포시 밖을 내다보며 유혹한다. 난 크기가 작든 크든 간에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열매 따 먹는 것을 좋아한다. 알이 굵고 윤기가 나는 앵두를 하나 따서 입에 넣는다. 역시 기대한 그 맛 싱싱하고 달콤하면서 약간 신맛. 씨는 열매의 크기에 비해 크긴 했지만.
마당 꽃밭에는 오랜 시간 정성 들여 가꾼 작약, 수국, 야생화, 작년에 심었다는 사과나무 세 그루, 이름 모를 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친정집 꽃밭에는 꽃나무를 한편에 조금 남겨 두고 대부분의 흙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고추나 호박 같은 작물이 자라고 있는데 조금 낯선 모습이다. 언니네 마당에는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딱 그만큼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식물로 가득하다. 허전할까 봐 담장에는 붉은 장미가 피어있다.
대문 안쪽 햇살 받기 좋은 계단 아래에는 언니가 지난해부터 정성 들여 키운 다육 식물들이 너무 예쁘고 앙증맞게 잘 자라고 있다. 언니는 다육 식물 몇 가지를 꽃 밭에서 쑥쑥 뽑아서 그릇에 담아 준다. 잘 키워 보라면서. 마지막으로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서야 대문 밖으로 나왔다. 언니네 아버지 드리라며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드렸더니 받지 않겠다고 우겨서 겨우 쥐어주고 나왔다. 농사는 언니가 아니라 아버지가 지었으니까. 언니는 인심만 쓰고. 친정 텃밭에서 있는 것 없는 것 다 찾아서 승용차 트렁크를 채우려 드는 엄마가 생각났다. 친정을 다녀온 느낌이다. 채소를 좋아하는 난 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있는 큰 봉지를 무겁게 들고 집에 들어가자, 얼마 전 큰 봉지의 과자를 얻어 온 남편이 '뭘 그렇게 많이 가져왔어?' 한다. 나도 거절을 못해서 생각보다 많이 가져왔다고 했다. 남편이랑 나는 비슷한 점이 많다. 봉지를 풀어보니 열무와 채소의 양이 많기는 많다. 어떻게 다 먹을지 걱정이 앞선다. 약간의 후회도 된다. 다음날, 다육 식물은 오래된 대접에 옮겨 심고, 열무는 물김치 맛있게 담가서 동생에게 나눠주고, 김치 담그며 조금 남겨둔 부추와 방앗잎, 매운 고추, 양파, 홍합을 넣고 맛있는 부침개도 해 먹었다. 아직도 먹어야 할 채소가 많이 남았다. 한동안 장 보러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