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어드는 산책길

낭만과 배고픔 사이

by 나를 아는 사람

퇴근 후 밥 대신 삶은 감자 반 개를 먹고 운동 겸 산책에 나선다. 마음 같아선 뛰고 싶었지만 최근 며칠 운동을 많이 해서 발바닥이 아픈 남편 때문에 걷기로 했다. 아주 빠른 걸음으로. 등에선 땀이 흐르고 발목과 종아리엔 힘이 잔뜩 들어간다. 자주 다니는 길이지만 그날그날 풍경이 달라서인지 갈 때마다 좋다. 마주치는 사람도 다르고 들꽃의 모양도 순차적으로 바뀌어 간다.


우리가 지나가는 강 둑 아래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징검다리가 있다. 징검다리는 둥글둥글하지 않아서 예스럽지는 않지만 밋밋한 강물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는 한몫하고 있다. 폴짝폴짝 뛰어서 건너야 제맛일 것 같다. 비가 내린 지 오래되어서인지 징검다리를 넘쳐흐르던 요란스러운 물줄기는 숨 죽인 듯 조용하다. 강물이 철철 넘치는 소리도 없고, 징검다리를 살짝 덮고 넘어서 신발을 젖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게 만들던 아슬아슬한 물의 모습도 없으니 재미가 없다. 강 주변이 뭔가 심심하다. 우린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 되면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되돌아갈 때 이 징검다리를 이용한다.


징검다리를 보면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오래전에 남편과 여행 목적지를 찾던 중 길을 잃어서 우연히 알게 된 영주 무섬마을의 나무다리. 왠지 강물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와 나무다리의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추억 속에서 조심스레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빗방울을 얼굴에 맞았다는 남편의 말에 현실로 급하게 돌아왔다. 처음엔 주변의 나뭇잎에서 떨어진 물기인 줄 알았다. 강물을 유심히 살펴보니 잔잔히 흐르는 물결 위에 물방울의 흔적을 말해주듯 동그란 모양을 내며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빗물의 양은 늘어나고 굵어졌다. 그때까진 좋았다. 오랜만에 비를 맞으며 산책하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몸에 이상을 느낀 것은 우리가 가고자 했던 목표 지점을 돌아서 올 때부터 시작됐다. 비옷이나 우산이 없어서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중인데 갑자기 배가 고프고 온 몸에 힘이 빠졌다. 두 다리는 힘이 빠져서 걷기 싫어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빗물은 질세라 점점 더 굵은 빗줄기로 변했다. 공사 중인 강둑의 폭 좁은 길을 걷는데 중심 잡기가 힘들었다. 단 것이 확 당겼다. 도저히 혼자 걷지 못할 것 같아서 남편의 손을 붙잡았다.


남편이 강둑 주변의 남의 채소밭에서 아무거나 서리라도 해 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물 한 모금을 마시거나, 아삭한 오이 한 입 베어 먹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다 아무 사탕이라도 하나만 입에 넣으면 온 몸에 힘이 솟아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난 남편의 손에 의지해, 아니 이끌려 최대한의 속도를 내며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쉴 새 없이 퍼붓는 빗줄기로 운동복은 흠뻑 젖어 버렸다. 남편은 오랜만에 우산 없이 비를 맞으니까 낭만이 있다고 하고 난 먹는 생각만 하고. 아쉽게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지름길을 통해 집으로 되돌아왔다. 아마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은 우리가 자주 건너던 낮은 첫 번째 징검다리를 이용하지 못할 것 같다. 강물을 따라 위로 위로 올라가서 더 높고 튼튼한 두 번째 징검다리를 건너야 할 것 같다.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서 밥과 라면을 허겁지겁 먹고, 달달한 믹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겨우 살 것 같았다. 나의 산책 겸 운동은 이렇게 끝났다. 감자를 몇 개만 더 먹었어도 배가 심하게 고프지는 않았을 텐데. 아니 한 개만 먹었어도. 난 반 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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