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송한 할머니

호박잎을 사기 위해 보낸 시간

by 나를 아는 사람

대형 마트 입구 바로 옆. 북적임 속에 할머니 한 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할머니는 부추, 호박잎, 방앗잎을 팔고 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오다가 호박잎에 눈길이 끌린다. 마트에서 산 우유와 고기를 바쁜 걸음으로 차에 실어 두고 할머니에게 다시 간다. 할머니는 앞 손님에게 거스름 돈을 챙겨 주고 있다. 앞 손님이 가고 나자 난 호박잎을 사기 위해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연세가 많아 보였지만 호칭을 친근하게 어머니라 부른다. 글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할머니로 표기한다)

그때까진 몰랐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나:(바구니에 껍질 벗긴 호박잎을 가리키며) 할머니, 호박잎 얼마예요?

할머니:이천 원!

나:(만 원짜리 한 장을 할머니에게 건네면서) 호박잎 주세요!

할머니:(호박잎을 잡고 까만 비닐봉지에 담는 동안 호박잎은 봉지 밖으로 여기저기 떨어진다. 떨어진 호박잎을 주울 생각이 전혀 없다. 눈만 끔벅끔벅. 말 문을 닫는다. 그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만히 있다)

나:(기다린다. 이상하다)

할머니:(기다려도 할머니는 거스름 돈을 줄 생각이 없다)

나:(잠깐 드는 생각. 혹시 할머니가 치매인가!, 아니면 갑자기 계산이 안되나, 그것도 아니면 순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여러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기다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나:할머니, 거스름 돈 주셔야죠?

할머니:나한테 돈 안 좋잖아!

나:할머니, 조금 전에 만원 드렸잖아요! 거스름 돈 주세요!

나:(거스름 돈을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 원짜리 두장이 들어있는 지퍼 달린 동전 지갑의 입을 쫙 벌려서 보여 준다) 지갑에 거스름돈 받은 게 없잖아요?

할머니:(믿지 못하는 눈치다)

나:(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할머니에게 돈을 주지도 않았으면서 돈을 지불한 것처럼 우기는, 오해 사기 딱 좋은 그런 장면이다)

할머니:(딴소리를 한다) 아까 좋잖아!

나:(억울한 표정으로) 저, 안 받았는데요!

할머니:(가만히 듣고만 있다)


잠시 후,

할머니:(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앞에 손님한테 준걸 착각했네!

나:(황당한 얼굴로) 할머니, 호박잎이 이천 원이니까 거스름돈 팔천 원을 주셔야죠?

할머니:(주섬주섬 돈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꺼내 놓는다)

나:(언뜻 봐서 천 원짜리 지폐 여덟 장 정도와, 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이 보인다. 지폐는 한 장에 딱 두 번씩 질서 없이 접혀 있다)

할머니:(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씩 나에게 주고)

나:(받은 지폐를 한 장 한 장 펴가며 천 원, 이천 원, 삼천 원... 팔천 원까지 세고 나서야 거스름돈을 다 받는다)

할머니:(천 원짜리를 내가 다 가져가서인지 싫은 표정으로 구시렁거린다)

나:(빨리 집에 가서 저녁 해 먹고 운동 가려면 바쁜데, 호박잎 사느라 시간을 몽땅 써버려서 걱정이 된다)


집에 돌아와서 호박잎을 찌는데, 혹시나 호박잎이 상했거나 질겨서 못 먹으면 할머니를 미워할 것 같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호박잎이 부드럽고 맛있어서 할머니에게 가진 불편한 마음이 스르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천만다행이다. 내 마음은 이렇게 잘 알겠는데, 할머니의 마음은 끝내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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