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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를 아는 사람 Jul 11. 2023

장난이 심하면 장난이 아니지요

어린날 있었던 이야기다. 주말.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아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어 갈 때, 저 너머 가게에 동생과 난 심부름을 간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나는 할머니의 흰 고무신을 신고, 세 살 어린 동생은 엄마의 흰 고무신을 신었다. 신발은 우리에게 나룻배처럼 크다.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울면서 우리가 왔던 길로 지나간다. 시간이 한참 걸려 가게에 도착해 물건을 사고 다시 다녀오는 길.

    

'애들아' 하고 누군가 우리 뒤에서 부른다. 심부름 갈 때 봤던 젊은 여자와 닮았다. 키 큰 여자는 우리에게 인상착의를 말하며 혹시 자신의 동생을 봤냐고 묻는다. 우린 당연히 봤다고 했다. 알고 보니 울면서 지나갔던 여자의 언니라고 한다. 어쩐지 키도 더 크고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언니 같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동생과 난 눈을 마주치며 이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 키 큰 여자는 허리를 굽혀 동생과 나에게 차분하고 의젓하게 부탁을 청한다. 동생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함께 가 주길 바란다. 가족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 우릴 걱정할 것 같아서 잠깐 고민했는데 승낙을 한다. 키 큰 여자의 얼굴에는 동생을 향한 그리움과 걱정이 가득해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키 큰 여자와 내 동생과 난 마을에서 우리 집을 지나 앞마을로 가는 중이다. 어둠은 점점 짙어져 가고 동생과 난 말없이 키 큰 여자보다 앞서 걷는다. 우리를 따라오는 건지 지켜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키 큰 여자는 아주 천천히 우리 뒤를 따른다. 앞마을을 내가 몇 번 먼저 가 본 이유로. 우린 동생을 잃어버린 언니의 마음으로, 꼭 찾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득 찬다. 동생과 난 어른보다 보폭이 좁아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는다. 겨우겨우 우리 마을에서 앞마을 입구에 거의 다 닿았을 때, 짙은 어둠 속에서 하얀 물체의 움직임을 발견한다. 우리 셋은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추고 만다.

     

우리가 걷고 있는 비포장도로 옆으로는 논밭이 펼쳐져 있는데 그중 한 개의 논둑에서 뭔가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다. 바로 그곳 끝에는 오래전부터 묘가 있던 자리다. 우리 셋은 동시에 '귀신이다' 외치며 움직일 수가 없다. 그다음 말을 잊지 못한다. 멈춘다. 위아래 하얀색의 그것은 점점 우리와 가까워지고 우린 피해야 한다. 난 질질 끌고 오던 큰 고무신을 벗어서 양손에 한 짝씩 든 채 돌부리를 밟으면서도 아픈 줄 모르고 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앞만 보고 뛴다.

     

앞마을 입구의 당선나무를 지나 마을에서 만나는 첫 집이자 유일한 가게. 그 초가집의 돌담을 지나 마당을 지나 마루, 방문의 쇠 손잡이를 잡고 바로 열어젖힌다. 남의 집 방문을 함부로 연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집주인들의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확 든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하며 방문을 조용히 닫고 마당으로 나온다. 그때서야 동생이 생각난다. 놀란 가슴은 진정이 되지 않는다. 마침 그때 키 큰 여자가 내 동생을 업고 태연히 나타난다. 키 큰 여자는 자신도 놀랐지만, 우리가 더 놀랄까 봐 태연한 척한다. 동생을 좁고 긴 의자에 앉혔는데 너무 무섭고 놀랐는지 몸이 뻣뻣하게 굳은 것처럼 보인다.

     

겨우 마음에 안정을 취하는데 초가집 돌담 뒤쪽에서부터 하얀 물체가 우리가 있는 집 입구 쪽으로 다가온다. 조금 전에 우리를 놀라게 했던 귀신이다. 이번엔 정신없고 힘도 빠져 도망갈 생각이 없다. 점점 다가와 우리 앞에서 멈춰 선다. 아…. 귀신이 아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게도 우리를 그렇게나 겁먹고 무섭게 한 것은 멀쩡하게 생긴 한 젊은 남자다. 키 큰 여자는 화가 치밀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 남자를 향해 큰소리를 친다. 아이들이 얼마나 놀라준 아느냐고. 키 큰 여자와 나이가 비슷한 이 남자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지만, 여자는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의 동생을 향한 걱정이 앞서고 어린 나와 내 동생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에 난데없이 귀신 놀이라니.

     

어둠 속 남자의 옷차림은 영락없이 귀신으로 오해받을 만하다. 위에는 하얀 셔츠를 입고 아래에는 하얀 파자마를 입고 있다. 사람 소리가 나길래 장난을 쳤다며 미안하다고 한다. 우리가 놀란 것에 비하면 남자의 사과는 별 의미가 없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소란스러운 이런 상황에서도 초가집주인은 곤히 잠들어 일어나질 않는다. 시골이라 초저녁에 잠들어 깊은 잠에 빠졌기 때문이리라. 남자가 간 뒤, 키 큰 여자와 우리 자매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을 곳곳에 그녀의 여동생을 찾아 나섰지만 아쉽게도 만나지는 못했다. 그 시간 이후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너무 놀라서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부터 난 키 큰 여자를 다시 만난다. 다행히 여자의 동생은 집으로 잘 들어왔다고 한다. 우리의 초등학교 등교를 위해서는 키 큰 여자의 집을 지나가야 한다. 매일 등교 시간에 맞춰 그녀는 대문 앞에 나와서 맛있는 음식을 내게 건네주며 고맙다, 학교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한다. 한참 동안. 얼마 동안인지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한 달 이상은 된 것 같다.


중년이 된 지금도 머릿속에 그 장면 하나하나, 놀란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키 큰 여자는 지금쯤 몇 살일까? 여자의 동생은? 그때의 기억을 나처럼 하고 있을까? 장난이 어떤 이에게는 평생 각인이 되어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장난이 장난 아니게 머릿속에 오래 기억된다.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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