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게 펼쳐진 남해 바다의 전망을 봐야 하는데 겁이 나서 돌아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사방으로 펼쳐진 멋진 풍경을 보며 환호한다. 산을 오르다 보니 폭이 좁고 가파른 바위가 있는 위험천만한 능선을 지난다. 두발로 걸어서 지나가야 하는 길을 나만 네 발로 아슬아슬 걷고 있다.
나의 그 더딤을 참지 못하고 뒤따라 오던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 본인은 빨리 가야 하니 비켜라고 한다. 뭐가 그렇게도 급할까. 비켜줄 정도면 왜 네발로 걷겠는가. 두 발로 꼿꼿하게 서서 걷지. 꼼짝 못 하고 발만 겨우 걸친 채 찌그러지듯 몸을 펴지도 어쩌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멈춰 있는 척했다. 함께 산에 오른 일행은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왜 그러냐고 하는데, 난 생긴 것과 다르게 겁을 낼 때가 있다.
특히 난간처럼 폭이 좁고 두 발을 안정적으로 딛지 못하는 곳에서 가장 겁을 낸다. 가파른 바위가 많이 노출된 날카로운 능선을 오르기 전에는 어김없이 안전한 길과 위험한 길이 나온다. 선택의 순간이 온다. 난 겁이 나지만 항상 위험한 길을 선택한다. 위험해도 피하지 않고 덤빈다. 무섭긴 하지만 이곳을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으려고 마음이 끌리는 길로 들어선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콩닥콩닥거리긴 하지만 참고 견뎌낸다. 마음속으로 바람만 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희망을 갖는다. 바람이 불면 더 무섭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이 도사리는 위험한 길. 그곳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뾰족해 보기만 해도 무서운 그곳에 서 있을 때 쾌감을 느낀다고 한다. 난 언제쯤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난 가파른 바위 능선뿐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사람과 통화를 해야 할 경우 겁이 난다. 외국어를 하지 못해서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한 기억이 있다. 그런 내가 가끔 어떻게 된 일인지 외국인을 길거리에서 만나면 대화를 시도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가 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한여름이라 햇볕이 내려쬐는 논두렁 길로 퇴근 중이었다. 난 잘 다듬어진 도로 대신 구불구불한 농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 같은 길로 가는 것보다 다른 길 걷길 더 좋아한다. 그날도 등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다행히 양산을 쓰고 있어서 더위를 조금은 견딜 수 있었다. 거의 서로 부딪힐 것 같은 좁은 농로에서 미국인인 듯한 외국 여성을 만났다.
난 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웃었다. 그녀는 등에 불룩한 가방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것 같았다. 난 그녀에게 이렇게 더운 날 왜 모자도 안 쓰고 다니냐고 말하고 싶었다.(별 걱정을 다한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는 내가 그녀에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잠깐 생각해서 겨우 찾아낸 한 단어 '캡(cap)' 모자를 떠올렸고, 손으로 머리에 모자 쓰는 시늉을 했다.
한참 동안 나의 행동을 지켜보던 그녀는 그때서야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는지 '오케이, 오케이'하면서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서 모자 하나를 꺼낸다. 가방에 들어 있던 모자가 생각났던 모양이다. 그녀는 모자를 머리에 쓰면서 계속해서 '땡큐, 땡큐'를 외치며 나와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난 괜히 기분 좋아서 들고 있던 분홍빛 꽃무늬가 그려진 양산을 뱅글뱅글 흔들어 본다.
살다 보면 겁이 나고 무서워서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피하거나 외면한다면 어떻게 될까? 요리조리 피하지 말고 맞서 보면 나름 요령도 생긴다.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무서움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