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해서 행복한 나
전혀 몰랐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이 먹을 줄은. 시간이 흐르며 나이를 먹게 되는 건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섭리라지만, 20대 후반까지는 사실 나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고, 지금에 와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내 꿈이 변호사라고 말했던 이유는, 그저 뭔가 ‘정의’의 수호자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그 뒤로 누구나 으레 그렇듯 꿈은 계속 바뀌었고, 외교관, 국제기구 종사자의 꿈은 우리나라를 돕고 어려운 사람들도 돕겠다는 생각, 통역사는 내게 도전이 되고 관심 있는 걸 하자는 생각, 라디오 PD는 타인에게 공감과 위안을 전하면서 내가 재미있어하는 걸 하자는 심산이었다.
다만, 스물일곱에 대학을 다니며 방송 작가 일을 계속하다가 흉추가 부러져, 그야말로 ‘피 말리는’ 방송계에 몸 담는 것을 포기하고 난 뒤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반추해 보면, 국내 대기업이었던 포스코 원료 구매 담당 1년, 외국계 회사였던 한국쓰리엠 생활용품 사업부 영업, 이커머스 세일즈&마케팅 5년, 모바일 소비자 조사 스타트업 아이디인큐 1년을 거쳐, 현재 말레이시아에서의 2년차 외국 생활 등,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또 사람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길로만 쭉 걸어왔더랬다. 실로 다양한 이유였지만 퇴사도 몇 번 했고, 도망도 몇 번 쳤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눈앞에 있는 선택들이 현재 나에게 있어 최선이라고 여겼었다.
사실, '인생 3.0'. 젊은이의 인생에 방점을 찍는 듯한 서른이라는 ‘의미심장’한 나이를 지나고 나서도, "와, 이제 밤새 못 놀겠네", "술이 더 안 들어가네", "운동하면 숨이 딸리네"등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나이먹음을 희화화하는 가벼움도 있었더랬다. 그리고 이제는 서른여덟, ‘이미 불혹이지 않느냐’고 놀림을 받기도 하고, '짠내 나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이유들이 ‘나이 먹어서 그래’라는 말로 결론이 나버리는 때가 왔다. '30대 후반'이라는 규정이 시쳇말로 '빼박캔트'인 나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으면 세상을 더 잘 알게 될 것만 같은데도, 가끔은 불안해지곤 한다.
여전히 뭣도 몰라 불안하고 흔들릴 만한, 서른여덟 한국 남자.
지금 한국사회의 기준에서 서른여덟의 나를 규정짓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이가 없는, 집이 없는, 뭐 그다지 물려받을 재산도, 쌓아놓은 돈도 없는, 그렇다고 남들이 말하는 ‘안정적이거나 탄탄한 직장’을 다니지도 않는. 오히려 ‘바보 같고 미련하게’ 시간이 갈수록 그런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온. 사회의 현미경으로 보자면 뭐 이런 것들이 나라는 인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묘사가 아닐까 싶다.
무언가 나이 든다는 것이 한 살 또 한 살 나이 먹음을 넘어, 생각이 깊어지고, 삶이 좀 더 명확한 색깔로 보이고, 그림이 명확해지고 그러면 참 좋으련만. 인생이란 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그저 아주 소박하게도, 나이 들면서 지금 이보다 더 쩨쩨하거나 비겁해지지만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될뿐, 아직도 여전히 많은 것들이 불투명하고, 잘 모르겠고, 그래서 더 불안한 게 나이듦이라는 것.
이 불안이란 어디서 오는가?
‘불안’은 보통 사전적으로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고 조마조마하거나, 분위기가 술렁거리어 뒤숭숭한 느낌’을 말한다고 정의된다. 인간은 보통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 습관적이고 잘 아는 것들에서 안정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의 얇디얇은 ‘보호막’을 흐트러뜨리거나 깨지 않는, 안정된 편안함을 추구하고 싶어 한다. 다만 인생이 그렇게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시시때때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나.
하지만 두려움이라는 것은 원체 내가 어떤 상황인지,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무지에서 오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를 감싸는 이 불안이란, 아직도 인생을 잘 모르겠기에, 혹은 반대로 차가운 현실을 서둘러 알게 될까 봐 두려운 느낌이 자아내는 묘한 감정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럼, 불안의 반대말은 뭐지? 안정인가?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걱정과 불안인가? 그렇다면 ‘불안’의 반대말은 '안정'이 아니라 ‘성취’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인생이란 것이 마땅히 안정적이고 정착되어 있어야만 할까? 사회가 정한 것마냥, 집 있고 배우자가 있고 아이가 있고 목돈이 있고 꽤 살만해지면, 안정을 느끼며 행복해질까? 그렇다면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으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잘 알고 있고, 그것들을 ‘성취’해 내기만 하면 불안하지 않게 되는 건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안정'을 찾으려고 더 불안해지는 사람들
보통 과년한 나이가 되어 결혼을 작심하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말이 ‘이제 정착하려고’ 혹은 ‘안정을 찾고 싶다’는 건데, 가끔은 그게 내겐, 쉽게 와 닿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이가 들면 으레 결혼해야 해서 '천문학적인' 결혼자금을 모아야 하고, 남들보다 늦기 전에 아이를 가져야 하고, 아이 대학 보낼 시간까지 돈을 벌려면 더 빨리 서둘러 아이를 가져야 하고, 혹여나 누구라도 아프면 돈을 못 버니까 죽을힘을 다해 건강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쉬어야 할 때 쉬지도 못하는 삶을 살면서, 죽을 때 쓰지도 못하는 돈을 '죽어라'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나?
서둘러 결혼해야 하기 때문에, 또 늦기 전에 집을 사야 하기 때문에, 그 집을 사려면 어마어마한 대출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아플 수도, 쉴 수도 없이 살지 않나? 그래서 이렇게 사회가 규정해 놓은 ‘기준’을 ‘잘 알고’, 퀘스트 깨듯이 죽어라 '성취'해 내면, 불안이란 게 과연 사라질까? 한번 망가져 버리면 다시 일어나는 게 너무도 어려운 사회이자 세상인지라, 죽도록 달리기만 하면서 만성적인 무기력을 강요당하는 삶을 꾸역꾸역 잘 살아내는 게 안정일까?
서른여덟, 내가 조금은 다르게 규정하고픈 불안
내가 말하고 싶은 '나이먹음의 불안'이란 것은, 나이가 들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세상이란 걸 알게 되면서 오는 두려움’, 혹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꿈꾸는 것들을 쉽게 못한다는 절망감에서 오는 불편한 마음’이다. 때론 한국사회에선 ‘안정’이라는 것이, 보통 ‘잘리지 않을만한’ 직업, 일자리로 규정되곤 하는데, 이런 기준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익숙한 것’에 ‘눌러앉음’을 택하게 되기도 하는 듯하다.
“이제 와서 내가 뭘 새롭게 더 하겠어?”
“여기서 내가 벌써 10년인데 그냥 계속 군소리 없이 잘 다니면 되겠지.”
“대출도 있고, 이제 애도 있는데 그냥 살기에도 빠듯해서.....”
너무나 자주 듣는 푸념들이지만, 이런 마음이 어디 ‘안정’을 보장해 주기는 하던가. 비약적인 표현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과연 한국에서 줄타기, 비비기, 무한 인내심 테스트, 불의도 못 본 체 하지 않고서, 어디 호락호락하게 쉰, 예순이 될 때까지 다닐 수 있는 회사, 직장이 많기라도 하던가? 그 얄궂은 회식에 얼굴 안 비쳤다고 인사고과가 깎여버리고, 무능력의 극치인 사람이 '능력 질소포장’으로 ’ 동아줄’ 잡고 눌러앉으면서 과,차장되고 부장되고 임원되는 세상에?
결국, 내 스스로 규정짓는 불안
그저 원하는 것을 좇고 싶다는 미명 하에, 여러 직장을 다녀보았고, 퇴사도 여러 번 해봤다. 사실 ‘불혹’이 되어가는 이 나이에, 3-4년 뒤 특별히 할 게 없으면 어쩌지, 언젠가 나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이런 불안이 엄습해 올 때도 있음을 고백한다. 올해 10월이면 꽉 찬 서른여덟.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결코 적지 않은 나이. 세상이 규정하지 않는 길 위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느끼는 불안은, 사실 ‘내가 이내 곧 안주’하게 될까 봐, ‘안정’을 내 인생 최우선으로 여기는 날이 올까 봐 느끼는 불안이다.
인생이란 것이 성공과 실패, 도전과 낙담, 좌절과 재기, 오르막과 내리막이 버무려진 인생이란 걸 충분히 알고 있는, 알게 된 나이라면, 이게 정말 끝이 아니라면 젖어들 이유가 없는 두려움, 해 보지도 않고 할 수 있을까 하며 갖는 의구심 등은 저 멀리 던져버려야 하는 ‘무의미한 불안’이 아닐까. 가능성과 능력을 채 시험해 보지 않은 불안은, 그야말로 의미가 없는 불안일 테니까 말이다.
지금까지 불안해 왔던 미래들도 모두 언젠가 과거가 되고 마는 ‘현재’일뿐이었는데, 굳이 미래의 불안을 가불해서 삶을 잠식시키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말고, 현재를 충실히 살며 알차게 채워나가는 걸 고민하는 쪽이 훨씬 보람있고 현명하지 않을까. 되돌릴 수도 없는 과거에 연연하거나, 알수도 없는 미래에 지레 겁먹지 말고, 현재를 충실하게 채울 수 있다면, 그렇게 현재에 집중하면, 나에게 주어질 미래들이 튼실하게 빼곡히 쌓여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어쩌면 나는, 불안은 선물이라 규정하고 싶다. 그게 바로 내가 지금 불안하지 않은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지만, 반대로 아무것도 모르니까 부딪혀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는 마음. 그 마음은 불안이 선물해준 '희망'인 것 같다.
그 희망으로 무엇이든 도전해 본다면 결과가 무엇일지 궁금해, 서둘러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빨리 넘겨보고 싶은 생각이 들것이다. 그게 사회가 말하는 불안 속에서도 ‘나를 더 살아가게 하는 열망과 호기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끝을 뻔히 아는 삶에 무슨 재미와 즐거움이 있겠나. 그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다. 그냥 되는대로 살면 되니 말이다.
나는 단지 그저 내가 나 자신의 ‘스포일러’가 되어, 더 읽고 싶지 않은 책, 더는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 보고 싶지 않은 영화로 인생을 마무리 짓고 싶지 않다. 뻔한 이야기, 진부한 주제, 식상한 클리셰로 남기 싫다. 그럼 ‘아직은 젊다면 젊은 서른여덟의 나’도 금세 폭삭 늙어 시들어 버릴 것 같다.
당장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는 불혹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당연하기에, '지금 이렇게 한다면 나중에 이렇게 되겠지'의 옅은 자기 확신 정도만 갖고 살아도, 삶이 꽤 괜찮겠다 싶다. 그렇게 매순간이 충만한 삶이라면 가치 있지 않은가.
'끝까지 관전해 볼만한 재미가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 나의 새로운 도전이 앞으로 또 무엇일지가 궁금하고, 그래서 어떤 길 위에 서 있을지 알고 싶은 사람, 그래서 끝까지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다시, 나는 불안하다. 그래서 행복하다.
나는 불안하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지금 무척이나 행복하다. 나의 내일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궁금하다는 것은, 더 알고 싶다는 것이고, 더 알고 싶다는 것은 설사 두려움이 있더라도 피하지는 않겠다는 것, 두렵지 않다는 것은,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서른여덟, 한껏 불안한 지금이 나는, 불안하지 않다. 어쩌면 불안은 때로는 선물이기에 결국 서른여덟의 나는, 예전보다 더 큰 선물을 받는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불혹不惑. 40세를 이르는 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한다고 한다.
불안한 나이, 서른여덟.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의 내가, 앞으로의 내가, 내 일이 아닌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단단한 내가 되는 멋진 ‘불혹’을 맞이하고 싶다.
위대한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Some painters transform the sun into a yellow spot, others transform a yellow spot into the sun”. 누군가는 태양을 노란 점으로 그리지만 다른 누군가는 노란 점을 태양으로 바꾼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Only put off until tomorrow what you are willing to die having left undone”.
안 하고 죽어도 좋은 일만 내일로 미루어라.
세상의 기준이 정한 불안의 길을, 나는 오늘도 진득하게 밟아나갈 것이다. 안 하고 죽어도 좋은 일만 내일로 미룰 것이다. 그렇게 오늘을 충실하게, 재미있게,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불안한 도전’을 해 나가면서 뜨겁게 살고 싶다.
아직 저 하늘 위에 뜬 샛노란 태양처럼 충분히 뜨거워서, 또 내일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나는 그래서 불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