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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인의 청춘 Dec 16. 2019

채식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채식의 묘한 딜레마

넷플릭스 [The Gamechanger] 게임 체인저를 보고 채식을 하게 됐다. 외부의 영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절친인 친구 커플이 이 에피소드를 보고 이제 막 채식을 한 지 2개월에 접어들었다면서, 오랜만에 만나서는 이제 고기를 먹지 않으니 혹시 고기가 없는 식당에 가도 되겠냐고 묻길래, 대체 어떤 이유에서 갑자기 채식을 하게 된 거냐 되물었다. 고기를 어마어마하게 잘 먹던 친구들이라서.


"음, 너 넷플릭스 구독하지?"

"응. 그런데 왜?"

"거기 게임 체인저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한번 꼭 봐."

"응? 아직 본 적 없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어?"

"응, 어마어마해."

채식을 시작했다는 나 때문에 제일 친한 분의 가족 전부가 인도 식당에 갔던 날.


그로부터 한 달 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밖에 나가기도 그렇고 뇌가 심심하단 생각이 들어 넷플릭스를 틀었다가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게임 체인저'라고 그랬었나...?"


침대 너머 모니터에서 The Gamechanger가 시작되었고, 그 후 한 시간 뒤, 나는 집 아래 슈퍼마켓에 내려가 장을 봐서 올라왔다. 오랜만에 요리를 했고, 밥을 먹었다. 그로부터 16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채식 중이다. 내가 언제까지 채식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건은 아니다, 그저 육식을 하지 않을 뿐-지금까지 느낀 채식의 딜레마를 풀어내 본다.


1. 재료비가 어마어마하다.

아니, 생전에 안 사던걸 사려니 도대체 뭘 사야 하는지 감이 안 오더라. 사실 슈퍼마켓에서 제일 놀랐던 점은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렇게 많은 야채, 채소의 종류가 있는 줄도 몰랐다는 점이자, 내가 슈퍼마켓을 갈 때마다 매번 똑같은 동선으로 카트를 끌고 지나갔구나, 하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심지어 그 어느 선반에도 '채식'을 위한 식재료가 있었고, 물가가 싼 말레이시아에 '임파서블 미트'격의 식물성 고기 Plant based meat까지 있었다. 물론 굉장히 비쌌지만. 난생처음으로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장을 봐서 올라왔다. 저렴한 재료도 있지만, 다채롭게 먹어보려니 채식도 재료비가 만만치는 않더라.

심지어 뷔페에 가서도 육식을 하지 않았다.

2. 냉장고와 찬장이 어마어마하게 그득 찼다.

원래 보통 시리얼, 요거트, 물, 몇몇 과일밖에 없던 냉장고와 찬장이 그득하게 들어찼다.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 콜리플라워, 마늘, 양파, 배추, 토마토, 오렌지, 레몬부터, 나물, 미역, 검은콩, 강낭콩, 완두콩, 팥에, 두부, 유부, 고구마, 감자, 오이, 가지까지. 심지어 태어나서 처음 사본 재료도 있었다. 이 많은 걸 산 이유는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꾸준히 실천해 보자는 일종의 '자기 압박'도 있었다. 보이면 해 먹고, 있으면 해 먹을 것 같아서. (물론 지금까지는 쭉 성공했다)

식물로만 만든 패티와 파프리카를 넣은 버거

3. 썩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어마어마하다.

재료를 사두고 재료가 상할지 아닐지 전전긍긍하는 느낌은 더러웠다. (느끼기 싫은 감정). 날짜가 언제까지인지를 확인하며 음식을 해 먹다 보니, 저절로 식단이 줄줄이 생겨나더라. 점심에 이거 먹었으니 저녁엔 이거. 내일쯤 안 먹으면 상할지도 모르니 내일 아침이랑 점심은 이거. 이왕 사둔 걸 썩힐 수도 없는 노릇이요, 남의 손에 귀하게 자란 식재료를 썩혀 버리기도 너무 싫었다. 그랬더니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점심 메뉴를 생각하고, 점심 설거지를 하면서 저녁 메뉴를 생각하게 되더라. 지금까지 썩혀서 버린 재료는 없으니 미션 달성.


배추, 버섯 된장찌개


4. 설거지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가끔 하던 요리를 거의 매일 하자니 "이거 이거 안 되겠는데 이거?"였다. (펭-하) 프라이팬은 기본이요, 밥솥에 그릇에 조리도구, 식기류, 모든 걸 다 닦아야 했다. 설거지가 평소 하던 분량에서 서너 배는 늘었다고 해야 할까. 야채나 과일을 썰거나 즙을 짜고 나서도 이것저것을 닦아야 하고, 도마며 행주며 늘어나는 설거지는 정말 답이 없다.


핫팟!!!


5. 음식물 쓰레기가 어마어마하다.

마늘, 양파, 브로콜리, 감자 등을 다듬거나 요리를 해 먹으면 정말이지 그 부산물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게다가 요즘은-이것 때문에 정말 마음이 아프지만-거의 모든 식재료가 야채든, 과일이든 뭐든, 대부분 비닐포장이 되어 있어서, 보기에 좋고 담기엔 좋지만, 결국 환경에 도움이 전혀 안 되는 패키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 야채를 다듬으면서도, 버섯을 꺼내면서도 계속 생각났다. 하루 혹은 이틀에 한 번씩 버리던 쓰레기가 하루에 두 번 정도 버리는 것으로 늘어난 것도 이 부산물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식물성 재료만 넣은 파스타


6. 기분이 어마어마하다.

[게임 체인저]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육식으로 생겨나는 환경 파괴적 잔상들, 채식을 하면서 체력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져 세계 신기록을 세운 선수들의 이야기, 미국 소방관의 약 62%가 업무 중 재해가 아닌 육식으로 인한 심혈관 질환, 성인병, 심장마비로 사망한다는 사실, 운동선수에게 하루만 채식을 먹여봐도 다음날 치르는 피검사 결과에서 혈액이 바로 말끔히 변하는 장면, 또 성기능까지 '어마어마하게' 향상된다는 내용을 보면,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금 16일 차인 나의 기분도 어마어마하다.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Impossible meat를 넣은 임파서블 버거

6. 몸이 어마어마하게 가벼워졌다.

보통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 실제로 우리 엄마가 보면 놀랄 정도일 듯- 몸무게가 늘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 찌뿌둥하고 무겁던 느낌이 사라졌다. 정신도 조금은 맑아지지 않았나 - 하고 바란다 - 할 때도 있고, 무엇보다 속이 편하고 배가 편하다. 화장실을 가는 횟수도 줄었고 - 보통 때는 배가 차거나 해서 설사를 자주 하는데 그게 완전히 사라짐- 몸이 훨씬 가벼운 느낌이다.


천상의 맛이었던 퀴노아 나초 베지 플래터

8. 포만감이 어마어마하다.

소화가 되는데 오래 걸려서 그런지 몰라도, 그리고 내가 조리를 많이 해서 그런지 몰라도 포만감이 진짜 어마어마하다. 오래 배부르고 오래 소화되면서 군것질이 저절로 줄었다. 몸에 안 좋은 간식거리를 먹던 일도 거의 사라지고, 정 배가 고프면 두유를 먹거나, 과일을 먹거나, 견과류를 먹는다. 내가. 내가!!!!!! 그래서 그런지 평소 안 먹던 과자나 가공품, 합성 음료를 마시면 너무 달거나 너무 짜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놀라운 변화다.

직접 해본 마파두부밥


9. 만족감이 어마어마하다.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만 채식을 하면서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작지만 큰 만족감을 느낀다. 내가 무슨 대단한 동물 애호가여서 '무차별적인 살생을 없애자!' 뭐 이런 건 전혀 아니지만, 땅에서 자라고, 햇살과 함께 크며, 결국은 붉고, 푸르고, 초록 초록한 탐스러운 결과를 보여주는 찬란함을 섭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만족스럽고 뿌듯하다. 우리가 주로 먹는 소, 돼지, 닭 등을 키우려면 보통 우리가 채식을 통해 먹는 곡물, 채소의 양보다 6-7배가 더 들어간다고 하니, 내가 소, 돼지, 닭처럼 직접적으로 채소를 먹고 자라고 있다는 게 뿌듯하다. (응?) 소, 돼지, 닭을 조금 덜 먹는다는 자신만의 위안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코오오오오오오오오옹!!!!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앝!!!!!

10. 매식이 어마어마하게 줄었다.

서두에서 채식 재료를 사기 위한 비용이 많이 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저렇게 구매했던 재료들을 다 먹는데 거의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 계산해 보니, 평소보다 돈을 덜 쓰고 있더라. 집에서 요리를 더 하다 보니 밖에서 사 먹던 커피도, 차가운 음료도, 집에서 밥을 먹으며 따뜻한 차로 대신하게 되고, 가끔 허기질 때 햄버거, 패스트푸드로 때우던 간식거리를 바나나, 사과, 파인애플 몇 조각으로 바꾸고 나니, 돈도, 시간도, 에너지도 절약되고, 사 먹는 음식이 줄어서 몸에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직접 짜내린 레몬+오렌지+자몽즙. 간 해독에 진짜 좋다.


마지막으로 환경에도 좋은 일이라 하니, 하루하루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일도 없다 싶다. 내가 이 채식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일단 '해보고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한 것이지만, 막상 16일 동안 채식을 유지해 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몸에 안 좋은 것들을 거름 없이 먹고 살았는지 알게 되었고, 오로지 채식만 하면 몸에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던 오해도 바로 잡혔다. 물론 나는 비건 수준의 채식 주의자도 아니다. 치즈도 먹고, 우유도 먹고, 해산물도 먹으니까.


언젠가 내가 채식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혹은 육식을 조금 다시 늘린다고 해도, 내가 '죽어도 채식만 고집하겠다'라는 결의에 찬 다짐으로 시작하지 않았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까지 또 그래야 할 일인가도 싶다. 딱 그 정도의 마음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16일을 마음 편히 즐겁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죽어도 고기는 입에 대지 않을 거야'라고 마음먹고 시작했더라면, 길거리를 지나다가 맡은 고기 냄새만으로도 그야말로 환장했을 노릇일 게다.


나는 언제나처럼, 직접 해보고 생생하게 느끼는 사람이므로. 좋은 채식,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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