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재생되는 인생, 지하철 1호선에서.
신창행 1호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밤 10시 46분, 이제 곧 있으면 막차도 끊기려나. 1호선은 워낙 이용자가 많아, 모두가 집을 되찾아가는 이런 늦은 시간에는 자리가 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혹에나 자리가 난다면 그건 정말 행운이 깃든 하루라고 말해야 할 정도니까.
지친 하루였다 내게도. 대롱거리는 손잡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삼아 몸뚱이를 의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3만보를 넘게 걸었더니, 지친 기색이 드러나듯 가끔 무릎이 살짝 주저앉았다. 손잡이를 더욱 꽉 움켜쥐어보았다. 그러면 내 삶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것만 같은 옅은 희망이 있었다.
절대 내릴 거 같지 않던 내 앞의 청년이 갑자기 부스럭거리면서 노량진 역에서 내리려고 일어섰다. 어디 학원이라도 들렀다가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알바라도 하다 집에 가는 걸까. 이게 웬일인가 싶어 몸을 뒤로 돌려 자리에 앉아볼까 하다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 세웠다. 힘없어 보이는 머리를 빙 둘러, 엷게 눈이 내린 듯한 중년의 아저씨가, 축 처진 어깨로 터벅터벅 내쪽으로 가까워져 오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앉으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옅은 미소로 대답하고는 다시 손잡이를 움켜 더 꽉 움켜쥐었다. 30분 정도만 참으면 나도 집이니까.
아저씨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직장인을 위한 비즈니스 영어 강의'였던 것 같다. 얼핏 보기에도 저렴한 작은 이어폰을 끼고, 입술을 오물 조물 하시면서 문장을 따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아저씨가, 3분도 안돼서 고개를 떨구셨다. 목이 너무 꺾여서 '저러다 디스크라도 오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자리에 앉은 지 3분도 안돼, 저렇게 깊게 잠들 수 있을까.
여전히 동아줄에 매달려 천천히 아저씨를 바라다보았다. 아저씨는 한눈에 봐도 두꺼워보이는 가을 겨울용 양복을 입고 있었다. 요즘은 아무도 입지 않을 것만 같은 은색 줄무늬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낮 기온 31도였는데...... 저 양복, 덥지 않을까..?'
아저씨의 뒤통수 뒤로, 서리 내린 흰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까맣게 자라던 머리가 언젠가 잘려나갈 때쯤 희게 변하는 건지, 처음부터 흰머리가 나는 건지, 어쩌면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잠시 하얗게 반짝거리면서 '저는 이제 생을 다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아저씨의 양쪽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의 양복 어깨엔 옷태를 잡아주는 패드 같은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는데, 너무 불쑥 솟아 있는 바람에 어떻게 보면 약간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도 아저씨가 아주 오래전, 의기양양하고, 덩치가 좋았던 시절에, 그 당시 굉장히 유행했던 줄무늬가 들어간 양복을 샀었나 상상해 봤다. 그토록 덩치가 좋고 활력이 넘쳤던 아저씨가 나이가 들고 세월의 비바람에 깎여 조금 왜소해졌을 수도 있고, 고단한 회사 생활로 몸이 조금 야위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어깨 품이 저렇게까지 맞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커다랗고 두꺼운 양복을 한여름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도 입는 아저씨의 인생은 과연 어떤 삶이었을까. 엉덩이만 붙이면 3분 만에 곯아떨어질 수 있는 하루의 끝에, 아저씨는 어떤 기분일까. 혹시 다음 달에 있을 승진 시험을 위해 직장인을 위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할까. 아니면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언젠가부터 때에 맞는 양복을 사는 건 언감생심이었을 정도로 뜨겁고 치열했을까.
아저씨가 너무 깊게 잠드는 바람에 손가락 사이로 스마트폰이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어떤 사람일까. 회사에서는 행복할까. 아저씨의 오늘 하루는 즐거웠을까. 집에 돌아가면 씻을 힘이나 있을까. 가족들은 이렇게 늦게 귀가하는 아저씨를 반겨줄까. 저녁은 잘 챙겨 드시고 야근하셨을까.
아저씨 양복의 두께만큼, 몸에 맞지 않고 어색하게 불쑥 솟은 어깨만큼, 잠든 아저씨의 손에서 아직도 재생되고 있는 직장인을 위한 비즈니스 영어 강의만큼, 두터운 벽을 끝없이 넘어야 하고, 지칠 여유 없이 삶의 언덕을 올라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재생되고 있는 인생이, 나는 오늘따라 유독 애잔했다.
"이번 역은 안양, 안양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아저씨의 어깨가 내일은 조금 더 가볍길 바라며 플랫폼에 내려섰다. 한밤중인지 온도가 17도였다. 반팔을 입어서 그런지, 세상이 조금 으스스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직, 아저씨에게는 무척 다행인 밤이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