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춤의 감각을 찾아서-줌바
자전거 타기처럼, 이 세상 모든 능력들을 한 번만 익히면 평생 안 잊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언어나 운동은 그 반대에 가깝다. 아무리 공들여 익히고 어떤 경지에 올라도 단 몇 개월 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뇌와 몸이 딴지를 건다. 외국어까지 갈 것도 없다. 모국어조차 말하고 쓰는 일에서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버벅버벅 녹슨 티가 확 난다.
나는 댄스에 대해 매우 진지했으므로, 전략적이고 치밀하며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일단 '내가 현재 얼마만큼 음악에 맞춰 내 사지를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파악해보기로 하고 문화센터 줌바 클래스에 등록했다. 3개월짜리 주 1회-1시간 반짜리 대낮 수업이었다. 1년 반 넘게 필라테스와 플라잉 요가로 몸을 다져왔지만, 춤은 장르가 매우 다르다. 운동한 사람은 유연성과 체력 같은 기본기가 좀 좋을 뿐이다.
줌바는 라틴음악에 맞춰 추는 피트니스 댄스다. '피트니스 댄스'란, 운동능력 향상과 몸매를 위한 동작 반, 흥겨움을 위한 춤 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7년 전 체중감량에 엄청 효과가 있다고 해서 9개월간 배운 적이 있었다. 2000년대 미국에서 탄생해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던 때라 궁금해서 내 원칙-운동센터는 걸어서 15분 내-보다 훨씬 멀리 다녔다.
해 보니 라틴댄스 음악과 동작은 아주 흥겨웠으나 알려진 것처럼 엄청난 칼로리 소모가 있진 않았다. 역사와 전통의 에어로빅보다 운동 효과가 그닥이었고, 체중이 줄어든다던가 몸매가 예뻐지지도 않았다. 설상가상 강사가 바뀌었는데 라틴댄스라기엔 뭔가 어정쩡한 춤을 시전하기에(줌바를 유튜브로 익혔나) 그만두었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다시 줌바를 택한 건 워밍업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낮 11시 수업이라면 대부분의 수강자들이 주부이고 연령대도 높으며 난이도도 낮다는 의미다. 실제로 가 보니 맨 앞줄 고정 자리를 (암묵적으로) 갖는 40대 후반~60대 터줏대감 예닐곱과 30-40대 초짜 스무 명 정도로 구성돼 있었다.
안무는 쉬웠다. 선생님은 동작 설명 없이 바로 그냥 따라 추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클래스 횟수가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동작을 외우게 된다. 그러니 따로 훈련이 필요한 현란한 라틴스텝이나 골반 돌리기, 웨이브 등등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대신 초고속으로 안무를 외울 수 있었다. 나는 금세 옛 감각을 되찾았다. 곧 클래스에서 제일 돋보이는 춤선을 자랑했다. 오래됐지만 9개월 경력자 아닌가. 나는 곧 자신감 뿜뿜해서 3주 만에 고정멤버 바로 뒤, 두 번째 줄로 진출했다. 게다가 몸의 비율은 세대가 이어지면서 진화되는 것인지, 평소 키 작고 팔다리도 짧아서 부끄럽던 내 몸매가 그분들 바로 뒤에 서니까 매우 괜찮아 보이는 착시의 마법까지 벌어져, 기분이 매우 괜찮았다.
그런데 이 클래스 고참멤버들은 정말, 심각하게 몸치인 분들이어서 2년을 내리하고도 웨이브 하나도 제대로 안 되는 분들이었다. 선생님이 흉내 내며 놀리기도 하고 원포인트 레슨을 하기도 했지만 나아지지 않았고, 서로 포기상태인 것 같았다. 그러니 수업 수준이 어땠겠는가. 앞줄은 몸치이고 뒷줄들은 어정쩡 엉거주춤.
3개월이 지났다. 11회 중 총 9번의 수업 참여로 1시간 10분의 루틴을 채우는 곡들의 안무는 다 익혔지만, 한 시즌 더 들으면서 춤의 디테일을 잡으리라 마음 먹었다. 그래서 '시대착오적인' 종강 기념 뒤풀이 점심식사 자리도 따라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 운동 클래스들에 항상 '반장'이 있어서 명절이면 선생님 선물 산다고 돈을 걷고, 가끔 운동 끝나고 식사자리를 갖곤 했는데 세월이 변하고 점점 개인주의화되면서 그런 관습이 많이 없어졌다. 나는 지금이 훨씬 편하고 좋다. 실제로는 관심 없는데 얼굴은 자주 보니 괜히 오늘 이쁘시다는 둥 입에 발린 칭찬을 하고 시답잖은 날씨 얘기 주고받는 건 귀찮다. 조심스레 친분을 쌓아놓았는데 사정상 클래스 같이 못하게 되면 언제 친했냐는 듯이 연락이 끊기는 건 더 맘이 안 좋다. 지금 다니는 필라테스 학원에서도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선생님과 관리직원들과만 말하고 지내는데, 나뿐 아니라 모두 그러니 편하다.
그래서 강사를 모시고 간 줌바 종강 뒤풀이 식사 자리에도 젊은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대부분 첫 줄 고참들뿐이었다. 다들 나에게 엄청 관심을 보였다. 나는 미소를 장착한 채 열심히 대답하고 한 주 쉬고 새로 시작되는 수업에도 열심히 나올 것을 다짐했다. 그분들 화제에 귀 기울이며 이 문화센터에 대한 여러 정보도 습득하고. 그런데 화기애애하게 파한 그 자리 때문에, 나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이 분들 말을 들어보니, 이 클래스는 한 번도 새로운 곡을 추가한 적 없이 항상 똑같은 것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레퍼토리는 약 스무 곡인 것 같고, 그저 트는 곡의 차례가 바뀌어 왔을 뿐이었던 것이다. 다른 선생님이 진행하는 저녁 직장인반 줌바는 수준이 높고 파워풀해서 인기가 높은데, 그러다 보니 수강 경쟁도 치열해 기존 멤버들이 먼저 재수강 등록을 마치고 나면 남는 T.O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수업은 힘들어서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 했다.
갑자기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님 나라에선 애꾸가 왕'이라고(용어들이 매우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더 적합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2년 동안 웨이브 동작 하나도 안 되는 분들 틈에서 잘난 척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화기애애한 점심 모임 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변심한 나는 이미 해놓은 재수강 등록을 취소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댄스학원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