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준위와 활성화에너지에 따른 3가지 군상
이러한 경향성을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활성화에너지는 우리가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쏟아야 하는 에너지 장벽이고, 생성물 에너지 준위는 변화를 이끌어냈을 때 나의 상태이다. 더 좋은 상태가 보장되기만 하다면, 아무리 쏟아야 하는 에너지 장벽이 높아도 기어코 해내는 방향성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 마치 꿈을 좇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만 같다. 꿈을 꾸는 우리들에게 활성화에너지는 꿈을 이루는 속도에 영향을 줄 테지만 결국엔 이루어내게 될 거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 자연에서는 물질마다의 에너지 준위를 모두 다 전지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여서 자연이 설계된 대로 작동하지만, 이 세계에 갑자기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더 면밀하게 말하자면, 반응이 자발적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한 에너지가 주어졌을 때를 가정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 반응물에서 생성물로 전환된 경우는 확률적으로 분포하게 된다.
우리를 반응물에 직접 비유를 한다는 것은 반응 전체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그 확률 분포에 따르게 되는 여러 반응물 입자 중에 하나가 우리가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 반응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또한 생성물의 에너지 준위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변화를 하고 난 이후의 상태가 더 안정된 상태일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제대로 스스로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현 상황의 상태를 에너지 준위로 표현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차이를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설계자와 피조물의 능력 차이와도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실 자연의 이치대로 우리가 반응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 이렇게 갈피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있었을까. 여기서 크게 세 가지의 군상으로 나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먼저, 첫 번째 군상은 우리 마음대로 각자만의 에너지 준위를 정의하면 갈피를 잃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자신만의 기준을 설정하는 경우이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꿈꾸는 삶이 있다는 것은 꿈꾸는 모습에 가깝게 변화한 상태가 더 안정된 준위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정의한 방식을 굳건하게 유지하고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마음대로 에너지 준위를 정의한다는 것에 대한 태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독재자가 되어 국가를 마음대로 통치하는 자세로 정의해도 되고, 칼같이 엄격한 여러 평가 기준들을 펼쳐두고 섬세하게 숫자로 기록하는 방식으로 정의해도 된다. 심지어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값으로 하겠다는 우스꽝스러운 방법으로 정의하며 마음대로 기록해두고 있어도 된다. 하지만, 어떠한 태도로 정의 내려도 갈피를 잃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고자 한다는 의지는 모두 공유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자신만의 에너지 준위를 정의해 버리는 방식은 너무나도 정신승리에 가까운 것이라며, 모두가 다 함께 정의한 에너지 준위가 없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에너지 준위를 정의할 수 없으니 반응물의 상태와 생성물의 상태를 모두 모르는 상태임에도 반응물에서 생성물이 될 때 활성화에너지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활성화에너지가 없다는 것은 특정 상태로서의 자립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뜻이기에 필수적으로 모든 물질에 존재하긴 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 활성화에너지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두 가지 각기 다른 군상이 나온다.
두 번째 군상은 에너지 준위를 모르기에, 나의 행동이 지나친 활성화에너지를 넘으려고 한다던가, 비자발적인 반응에 뛰어드는 선택일 수도 있기에 괜한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경우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흐름이다. 이러한 자세로 삶을 지속하는 경우, 두 가지 양상의 감정 흐름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상태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이 된 상태로 정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이 안정성을 중요시 여기는 경우, 행복하게 삶을 지속하는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두 번째는 성공적인 변화를 이루어낸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하며, 괜한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경우이다. 이때 스스로를 갉아먹거나, 이 굴레에서 나오기 위해 상대방의 시도는 너무나 뻔하고 이루기 쉬운 상황이었을 거라고 단정 지어버릴 것이다. 그러다가 스스로 이 답답함에 견디지 못하고 위에서 말한 첫 번째 군상으로 스스로를 바꿀 수도 있다. 갑자기 자신만의 에너지 준위를 설정하고 되고자 하는 생성물을 설정하고 활성화에너지를 넘어갈 준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세 번째 군상은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활성화에너지를 넘는 과정 자체를 즐겨버리는 경우이다. 나의 노력과 에너지 소모를 통해 변화하고 싶은 생성물이 있기는 하나, 그 생성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나, 이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그 노력을 결심하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상태라는 점에서 두 번째 군상과 다르다. 활성화에너지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절대 못하는 경우인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덤빈다는 점에서 무모한 불나방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진짜 도달하기 힘들었을 반응을 성공시키는 유일한 군상일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삶의 선택을 하는 경우, 아주 강한 결심을 동반해야 할 것이다.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만큼 이를 포기하려고 하는 순간 크게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계자 포지션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 아닌, 나 자신마저 끝끝내 잘 알 수 없는 무지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내려온 상황에서 사실 어떠한 군상으로 지내는 것이 정답인가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어떤 군상으로 살기로 정했다고 이를 계속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다.
다만 내가 일상에서의 태도나 선택에 있어 어떠한 전제 조건을 깔고 세상을 보고 있는지 최대한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정리해 보았다.
탄생과 죽음은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인 생생한 죄
- 물고기,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 (박시하 시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