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도를 마무리하며
사색적인 것은 나만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 나만의 질문을 만들어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사람이 가진 과거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기대 사이를 맴돌며, 그 사이 어딘가에 계속 머무르는 상태다. 마음대로 답을 정하고 평가하면 그만일 수도 있는 것들이지만, 그렇게 맴도는 시간을 견디고, 또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사색이라고 느낀다. 정의되지 않은 ‘모른다’는 상태를 곧장 해소하지 않고 잠시 두는 태도 말이다.
사색을 한다는 것은 모르는 상태에서 아주 조금 앞으로 나아가 보고 싶어 하는 소망을 지니는 일이다. 그것은 애초에 정답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 만약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아마 “정답은 이것이다”라고 말하고 생각을 멈췄을 것이다. 여러 질문을 동시에 붙잡은 채 이 기억에서 저 기억으로 옮겨 다니다 보면, 질문의 색과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 결국 비슷한 말들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그 회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답이 없는 질문을 놓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는 걸까. 왜 모르는 상태에서 한 걸음 나아가도, 결국 또 다른 모름으로 옮겨갈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아가려는 걸까.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왜 나는 연구자로 살려고 하는가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학부까지의 공부는 시험과 성적, 즉 ‘안다’는 상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면서부터는, 내가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가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 말해왔고, 나는 그 뒤에 무엇을 더 덧붙일 수 있는가. 그 질문이 결국 논문을 쓸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새롭게 써내려가는 이야기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만약 누군가 완벽한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었다면, 그 이후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글이라 하더라도, 자연을 바라보고 제3자가 기록한 결과는 결국 그가 바라본 시선에 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글을 쓴다고 상상해 보면, 그 글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며 생긴 감상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내가 쓴 글을 읽고, 근원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계속 쓴다. 살아 있다는 말 속에는, 어쩌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뜻이 함께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그 시간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떠나가 버린 시간과 이미 와버린 시간들 사이를 마음속에서 하나의 가닥으로 잇기 위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남긴다. 그래서 굳이 왜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 힘 빠지게 들릴 만큼 사실에 가까운 질문이다. 그 질문을 잠시 옆에 두고, 나는 다시 어리석게도 이야기를 만든다. 그것이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것이든, 연구자로 살아오며 느낀 점들을 모아둔 것이든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보면 늘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는 질문이 길을 막는다.
의미를 찾으려다 의미 없음으로 귀결되기도 하고, 의미 없음을 확인하고자 다시 야심차게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한다.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질문을 던지는 이 반복을 두고 누군가는 왜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계속 붙잡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것을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모름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듯, ‘모름’이라는 대상도 각자의 삶 속에서 다르게 놓여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외면하고 지나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조금 더 다가가 보고 싶어진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때의 상태가 허락하는 만큼 다가가 보려는 것에 가깝다.
이렇게 다가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은 늘 함께 움직인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인지, 다른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방향인지, 그리고 동시에 내가 이걸 정말 좋아하는지. 이 질문들은 분리되지 않은 채 한꺼번에 작동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 두 차원은 이미 충분히 섞여 구분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하나를 배척하기보다, 이 혼재된 상태 자체를 나로 받아들이려 한다. 나만의 목소리를 찾겠다고 사회와 개인을 억지로 나누는 시도는 오히려 내 목소리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느낀다. 대신 지금 이 순간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말을 온전하게 내뱉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애쓴다.
삶에서 가장 기둥이 되는 가치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마이애미에서 친구와 맥주를 마시다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냥 대충 사는 삶’이라고 답했다. 특정한 보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도 아닌,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었지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로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걸 자유로움의 다른 말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나를 하나의 정의로 고정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압박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독립적인 상태에 머무는 일에 가깝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거부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대 때문에 움직이는 사람으로만 남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그 선택들의 흔적에 대해 스스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산책을 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과 그 흐름이, 내가 바라는 방향을 조용히 가리켜 준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나아가 사회에게 더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마음을 부정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향한 기대로 바꾸는 연습을 하고 싶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먼저 묻기보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해보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맞닥뜨렸을 때,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들 속에서 사소한 것에 기뻐할 수 있는 상태. 요즘 내가 바라는 삶은 그와 비슷한 모습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