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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리카노 Mar 11. 2022

이름표를 (똑바로) 붙여줘

혐오를 위한 이름표는 사절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전쟁을 일으킨 지 오늘로 보름째다. 달이 한 번 차는 동안 러시아군은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환자가 있는 병원과 아이들이 있는 학교, 유치원을 폭격했다. 무참히 스러져간 이들은 다른 나라도 아니고 푸틴이 ‘한몸이나 다름없는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 곳의 무고한 사람들이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국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결연한 의지로 러시아군에 맞서 싸우고 있다. 깜짝 놀란 세상 사람들 중엔 나도 포함되는데, 우크라이나를 잘 알던 사람들은 대개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특히 8년 전 러시아가 크름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무단으로 합병한 뒤 우크라이나에 가봤거나 우크라이나 친구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이들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소련 또는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푸틴의 야욕에 맞서 싸울 준비를 오래전부터 해왔다고 한다. 

압도적일 것으로 예상되던 러시아군의 전력은 알고 보니 허점 투성이었다는 분석이 쏟아진다. 날이 풀리면서 진창이 돼버린 우크라이나 평원에 바퀴가 빠져 꼼짝없이 서버린 전차에는 기름도 부족해 어차피 며칠 못 갔을 거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처음부터 왜 싸워야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명령을 받고 국경을 넘었던 러시아군 병사들의 사기는 보급선이 끊겨 먹을 게 부족해지자 땅에 떨어졌다.

전황이 푸틴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쾌재를 부를 일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걱정스러운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다. 바로 지금 같은 교착 상태가 한참 이어지는 것이다. 교착 상태가 계속된다는 건 더 많은 사람이 죄 없이 죽어간다는 뜻이다. 전쟁은 인륜을 정면으로 저버린 끔찍한 범죄 행위라는 걸 새삼 느낀다.


진흙탕에 빠진 러시아군은 반세기 전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고전하던 미군을 보는 것 같다.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는 판단하기 어렵기도 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특히 현대전에서는 전쟁에 발을 들인 모두가 패자다. 막대한 전비도 전비지만, 전쟁 때문에 잃어야 하는 (마찬가지로 대개) 무고한 침략국 젊은이들의 목숨 값은 어쩔 것인가? 

지난 12월, 워싱턴 D.C.에 갔다가 알링턴 국립묘지에 갔었다. 20세기 이후로 국한해도 미국은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대개 승리한 전쟁이지만, 저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뉴욕 곳곳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 푸틴을 규탄하는 목소리, 무엇보다 우크라이나와 연대하는 움직임을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전쟁이 보름째 이어지면서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전쟁 반대 목소리가 선을 넘어 엉뚱한 데로 불똥이 튀는 거다. 여기서 선은 무얼까? 간단하다. 규탄의 대상을 푸틴과 전쟁을 뒷받침하는 자본 같은 호전광으로 국한하지 못하고, 국적이라는 잘못된 이름표를 붙이는 거다.

잘못은 푸틴과 러시아 정부가 한 거지, 전쟁에 반대하는 러시아 사람들까지 덮어놓고 비난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진=블룸버그/게티이미지

꼬박꼬박 챙겨보는 ‘모닝브루’라는 뉴스레터가 있다. 미국 대학생들이 시작한 뉴스레터인데, 그날 일어난 일, 알아야 할 일을 간명하게, 동시에 아주 알차게 잘 정리해준다. 이미 상당한 투자도 받아 잘 나가는 비즈니스가 됐는데, 부럽다. 아메리카노 다음 시즌에 예정대로 매일 짧은 뉴스를 전하게 되면, 아마도 모닝브루를 자주 참조할 것 같다. 오늘 모닝브루에서 단연 눈에 띈 소식이 바로 잘못된 이름표와 외국인 혐오에 관한 이야기였다.

푸틴과 러시아군의 무도한 전쟁 범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아니, 비난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가장 강력히 처벌하고,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전쟁을 규탄하는 것과 러시아와 관련된 모든 걸 보이콧하고 매도하는 건 엄연히 다른 행위다. 그런 일이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맨하탄에 있는 러시안 사모바(Russian Samovar)라는 식당의 예약률은 최근 60%나 급감했다. 러시아 음식을 파는 식당의 주인 부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커플이다. 식당 홈페이지나 정문에 “전쟁에 반대한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연대한다.”는 메시지를 대문짝만하게 붙여놓았지만, 소용없었다. 식당 이름에 ‘러시아’라는 이름을 쓴 게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은 이름만 보고 멋대로 식당의 정체성과 의도까지 오해하고 예단한 우리의 편견이 문제다.

"우크라이나와 연대한다. 전쟁 반대"라고 써놓았지만, 소용없었다. 사진=뉴욕타임스

엉뚱한 데로 불똥을 튀기는 '잘못된 이름표 붙이기'의 사례는 더 있다. 영국 웨일스의 카디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최근 연주 목록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제외했다. "지금 시기에 맞지 않다"는 이유를 댔는데,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 사람이라 그런 결정을 내린 듯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터무니없는 결정인지는 다 아실 듯하다. 차이코프스키가 무덤에서 이 소식을 들으면 기가 차지만 어이가 없어 한숨만 쉴 일이다.

캐나다 밴쿠버 연주협회는 최근 20살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말로피프(Alexander Malofeev)의 공연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협회의 예술 디렉터는 캐나다 방송 CBC와의 인터뷰에서 "말로피프에게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걸 규탄하기 위해 협회 차원에서 내릴 수밖에 없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말로피프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러시아 사람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이번 일에 가책을 느끼며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을 국적만 가지고 판단하는 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밴쿠버 사람들이 퀘벡 사람들을 얼마나 같은 캐나다 국민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퀘벡의 대표적인 음식도 이름 때문에 애꿎은 책망의 표적이 됐다. 프랑스 파리와 툴루즈에 있는 메종 들라 푸틴(Maison de la Poutine)이라는 식당은 최근 들어 난데없는 협박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 식당 이름 때문이다. 메종 들라 푸틴은 우리말로 옮기면 "푸틴의 집", 즉 "푸틴 파는 가게"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푸틴은 철자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 지금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러시아의 푸틴(Putin) 대통령과는 다른, 퀘벡의 전통 음식 이름이다. 감자튀김 위에 치즈를 뿌리거나 그레이비소스를 끼얹어 먹는 음식인데, 나도 내쉬빌에서 푸틴을 한 번 먹어봤다. 같이 갔던 캐나다 친구들이 "이 집 푸틴은 형편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바람에 아직 안 먹어본 음식으로 치고 있긴 하다. 양배추 샐러드를 김치라고 팔고 있는 걸 미국 마트에서 목도했을 때 내 기분이 그때 캐나다 친구들의 마음이었을까? 아무튼 무리해서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나라의 독재자 이름이 김취찌계인데 그 사람이 내전을 일으켜 전 세계의 지탄을 받는다면, 전국의 김치찌개 식당은 꽤 낭패일 텐데... "푸틴의 집"이 처한 상황이 지금 그렇다.


사실 LA에 없는 갈비 LA갈비처럼 프랑스에는 없다는 감자튀김 프렌치 프라이(French fries)도 19년 전에 미국에서 이름 때문에 수난을 당했다. 2003년, 미국 의사당을 비롯한 미국 연방정부 건물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 3곳이 프렌치 프라이의 이름을 "프리덤 프라이(Freedom fries)"로 바꿨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프랑스가 영국을 제외한 유럽연합 대부분 나라와 함께 미국의 일방적인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감자튀김의 이름도 프랑스보다 더 직접적으로 자유를 떠올릴 수 있는 자유의 튀김으로 바꾸자"고 한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는 복수극이었다. 이름을 바꾸기로 했던 사람들은 지금쯤 이불킥을 하고 있을까?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직도 뭐를 잘못한 건지 모르고 있을까봐 걱정된다. 그런 사람일수록 지금 전쟁은 '러시아가 일으킨 거니까 나쁜 거'라고 여기고 목청껏 욕을 해대고 있을까봐 더 우려스럽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라면 저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좋은 전쟁', '나쁜 전쟁'은 없다. '부덕한 전쟁'이나 '정의로운 전쟁'을 구분하기도 실은 무척 어렵다. 난 사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하나같이 잘못된, 나쁜 일이고, 예외 없이 규탄받아 마땅하다. 특히 전쟁을 일으킨 쪽은 내세운 전쟁의 명분이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전쟁을 일으킨 데 따르는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정말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게 전쟁이라서 그렇다.

나는 19년 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지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다른 이름표를 붙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전쟁을 일으킨 원인, 동기가 몰상식으로 가득한 억지 논리와 거짓말이었다는 점에선 두 전쟁이 놀라울 만큼 닮았다. 푸틴이 20년 전 이라크에서 미군이 한 걸 그대로 따라 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결과의 차이를 만든 요인은 다른 데 있었다. 러시아군은 '충격과 공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만큼 강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시민과 군, 정부는 당시 후세인 정권과 이라크 시민들보다 훨씬 더 굳센 의지로 나라를 사수하고 있다.


엉뚱하게 붙은 이름표 때문에 누구나, 얼마든지 고통받을 수 있다. 요즘처럼 혐오의 정서가 쉽게 전염되고 그로 인한 범죄가 실제로 자꾸 일어나는 세상에선 그 사실이 더 선명해졌다. 그래서 이름표를 붙인다면 똑바로 붙이는 게 정말 중요하다. 특히 한 사회나 집단의 다수가 소수, 약자를 향해 붙이는 이름표는 자칫 혐오를 조장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아시아인을 향한 혐오가 실제 범죄로 나타나는 걸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뒤늦게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따라붙는 꼬리표가 얼마나 큰 짐이 되는지 절감하며 하는 말이다.

러시아 안에서 전쟁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졌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여론조사 결과가 맞다면 노바야 가제타 같은 독립언론을 사실상 강제로 폐간한 푸틴의 여론 통제, 국영 매체를 동원한 선전선동술이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뜻일 거다. 그럴수록 러시아 안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반전 시위에 나서는 러시아 시민들의 용기를 지원하고 이들과 연대해야 한다. "거 봐, 역시 러시아 사람들이 문제였어." 같은 식으로 섣불리 결론을 내린다면 그 또한, 푸틴의 선동에 휘말리는 셈 아닐까? 푸틴을 비롯해 전쟁을 일으키는 자가 늘 바라 마지않는 건 분명하다. 평화를 바라는 세력이 반목하고 분열하는 것이다. 그 바람에 재를 뿌리려면 이름표를 똑바로 붙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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