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수 있는 지 아는 법.
너 자신을 알라! 그러나 어떻게? 가 없다!
자기가 자신을 아는 일은 어려운 일일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수십 년을 소모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알지 못한다. 엉뚱한 것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여 평생을 온갖 헛것을 가져다 자신에게 붙이며 살기도 한다.
수많은 성인들이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또 '너 자신에게 답이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나 자신을 알라는 것인지에는 지도가 없다. 어떤 동화는 행복을 찾아 수많은 여행을 한 후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거기 자기 행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을 알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 나에 대한 타인의 비평과 칭찬에 기댄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생채기를 낼 뿐 진정한 나 자신은 타인의 평가나 비평에 기대어 알 수는 없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일
자신을 아는 일은 우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외부의 상황을 감지하기 위한 촉수와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뻗어나가고 외부와 관계를 하려 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과 생각 또한 끊임없이 외부로 흘러 나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선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이런 감각들이 느끼고 감지하는 것들과 일으키는 것들, 생각과 계획들, 감정과 느낌들 모두를 바라보는 일은 처음으로 내부를 향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의식적인 일이다. 우리는 무심코 자동화되고 습관화된 상태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럴 때 이를 바라본다는 것은 작지만 매우 강력한 의식의 불똥을 일으키는 일이다. 이 의식의 불똥을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의식의 불똥은 자꾸 커져서 횃불이 되어야 하고 종내에는 태양이 되어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자신이 그 행동을 하고 있음을 지켜보고 알아차리는 일이다. 자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있고 이런저런 것을 보고 느낄 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이런저런 것을 느끼고 있음을 보아야 하고 또 그것을 알아차린 상태에 있어야 한다. 또한 자기 마음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욕망하고 움직일 때,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고,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마음을 지켜보아야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속에서 감정이 올라올 때, 내가 이런저런 감정을 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지켜보고 알아차림 상태에 있어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욕망이 올라올 때도 내 안에서 이런 욕망이 올라오고 있구나! 하고 또 지켜보고 알아차림 상태에 있어야 한다. 욕망도,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도, 행동도, 모두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함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이 매 순간 어떤 상태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알아차리는 이것이 자기 자신을 아는 첫 관문이자 사람의 마음과 심리 그리고 삶을 알게 되는 첫 관문이다.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모두 헛것임을 아는 일
이렇게 자신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미쳐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된다. 마치 진흙을 가져다 자기 집을 지으며 자신을 키워가는 작은 벌레처럼 그렇게 우리는 온갖 것을 다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온갖 헛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어떤 물건을 선물 받게 되면 그 선물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자신의 삶의 일부로 여긴다. 그러다 그것을 잃게 되면 극심한 고통을 일으킨다. 돈이나 집 또한 부지불식간에 사회적으로 확장된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있다. 남편이나 아내나 가까운 친구가 생기면 또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가져와 자신과 동일시하기 위해 고통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이 유명인을 따르고 그들을 따라 하는 것 또한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몸부림 중에 하나다.
자신을 바라보기를 통해서 이런 자기 마음의 헛짓거리를 보게 되면 꼭 필요한 것은 오롯이 집중하여하되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저 멈추거나 내려놓거나 흘려보내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 점점 소탈해지고 소박해지게 된다. 그러나 중심은 보다 뚜렷해지고 힘이 있게 된다. 또한 헛짓거리와 헛것을 내려놓는 과정에서 자기자신과의 화해와 치유, 정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과정이 온전히 충분히 이루어 져야 한다.
가장 큰 동일시는 자기 몸과 자신과의 동일시다. 보통의 우리는 몸을 나 자신으로 여긴다. 우리는 과도하게 몸에 집착한다. 그래서 더더욱 몸에 온갖 치장을 가져다 붙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찬탄을 받으며 관심과 인정을 끌어내려 애쓴다. 몸속은 썩어가고 피부는 늙어가고 있어도 온갖 화장술과 그림 그리고 성형으로 자신을 만들기 위해 모든 애를 쓴다.
몸이 이렇게 자신과 동일시되어 있듯이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 마음과 생각 그리고 감정, 욕망과 느낌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 마음과 감정, 욕망과 느낌을 제외하고 그 어디에 자신이 있다고 느낄 것인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를 하지 않으면 결코 이것을 알 수 없다.
자신을 대상화하면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몸의 행동이나 마음, 생각, 감정, 욕망, 느낌과 같은 그것들을 바라보게 되면 점점 그것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결국에는 해체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말 자기 자신이라면 어떻게 자신이 그것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눈은 눈을 볼 수 없는 것 처런 자신은 자신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대상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하면 서서히 이런 논리가 생겨나고 그러다 보면 그것들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으로 삼고 있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
그것들, 감정, 욕망, 마음, 생각, 느낌, 몸등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내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들을 조절하고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마음에 일어나는 고통이나 슬픔 괴로움 등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감정들도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습관이라고 생각하던 것, 온갖 중독들을 어렵지 않게 스스로 고칠 수 있다. 심지어는 성격마저도 스스로 고쳐나갈 수 있다.
게임 중독인 아이는 자신과 게임 할 때의 재미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래서 절대 게임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게임의 재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알아차리게 되면 게임의 재미가 비로소 대상화된다. 그러면 아이는 게임의 재미라는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될 것이다. 게임의 재미에 절대적 힘을 부여한 것 또한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모든 동일시를 일으키는 것이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마음의 힘이 있는 경우는 즉각 그 모든 동일시를 내려놓고 그 동일시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계속해서 바라보기의 힘이 쌓이고 알아차림의 힘이 쌓이고 인지하는 힘이 쌓여야 한다.
마음의 흐름을 알면 내가 할 일을 알 수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또는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에 재능이 있는지 알고 싶어요.' 한다. 이에 대한 욕망은 아주 강력하다. 이런 욕망은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점 문화와 각종 자연철학을 발달시켜왔다. 그래서 자신이 운명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가 너무도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타인이 말해줄 수 없다. 타인이 말해주는 나는 아주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고 설명해주는 정도에 그친다면 자기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어떻게 타인이 내 마음을 알겠는가?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더 잘 느끼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그것을 누구에게 물어보겠는가?
자기 마음의 흐름을 지켜보면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무엇에 흥미나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이렇다.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 나는 꽤나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문득 내 마음속에서 뭔가를 자꾸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실이나 통찰을 얻으면 그것을 마치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계속해서 설명하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았음에도 또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하고 늘 궁금해했고 관련 책들을 사서 읽었다. 나는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의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배출하는 도구로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글쓰기 연습이 되었음은 물론 내 안에 수다를 풀어내는 것이기도 했다.
후에 나는 내가 책을 내고 강연을 하면서 그것이 내 마음이 흐르고 있던 방향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어떤 주제를 사색하고 통찰한 후에 여전히 그것을 풀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작가로서든 상담가로서든 그렇다. 내 미래의 삶은 그렇게 내 마음이 흐르는 속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을 찾고 만들어 가기에 그렇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다.
우리는 "진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깨달음 따위의 먼 별을 따려고 하기 전에 이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 울 통해 내적 시야를 키워가야 한다. 내적 시야의 크기가 그 사람의 크기가 된다. 자기 마음을 알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알게 된다. 이것은 정말 묘한 이치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이다.' 동학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다. 수운 선생께서 득도를 할 때 얻은 깨달음이다. 하느님은 수운 선생님께 너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마음을 앎으로써 하느님을 알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앎으로써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세상의 마음을 알 수 있고 하느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뜬 구름을 잡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그 하늘에 뜬 구름을 잡는 것에 대해서는 많이들 이야기해도 그 뜬 구름에 이르는 사다리는 없다. 만약 히말라야 산이든 하늘의 뜬 구름이든 어느 은하의 별이든 누군가 의식적으로 거기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곳에 이르는 지도나 세세한 안내 혹은 사다리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저 타인의 것을 책이나 글로 읽고 자기 착각 속에서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든, 행복을 찾는 것이든, 지혜를 얻는 것이든, 신을 아는 것이든 세상사를 통찰하거나 내 아이와 배우자와 친구의 마음을 아는 일이든 그 첫걸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고, 자신을 대상화하는 일이다. 이 일은 우주가 끝이 없듯이 끝이 없는 일이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이것을 해 나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바깥에 아무리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은 늘 잔잔하고 고요한 일상의 평화를 늘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우리는 더 이상 고통과 괴로움을 고민하고 행복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게 된다. 그저 지금 있는 그 상태가 언제나 늘 평화롭고 가장 좋은 상태가 될 것이다.
# "따돌림, 네 잘못이 아니야" 출간과 따돌림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스토리 펀딩이 진행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