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자기치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스 May 09. 2016

이별의 고통 어떻게 넘을까?

사랑은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다. 


사랑만큼 우리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있을까? 사랑만큼 내 존재를 긍정해주는 것이 있을까?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내 전 존재를 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동안 애물떼기 취급당하며 칙칙하고 별 볼 일 없이 살아왔던 지난날에 대한 통쾌한 한방인 것이며 동시에 그때까지 상처받았던 모든 것에 대한 한 순간의 힐링이다. 


사랑을 할 때만큼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되는 때는 드물다. 누군가 내가 좋다고, 나의 모든 것이 좋다고 할 때의 그 의아함 그러나 그것은 금방  환희, 가슴 두근 거림, 미래에의 장밋빛 희망으로 바뀐다. 그래서 청년기에 우리를 찾아오는 사랑은 참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뿐이 아니다. 사랑은 이제 우리의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힘들 때는 곁에서 힘을 주고, 어려울 때는 힘을 모아 함께 해 준다.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바로 옆에 있는 그 사람 아니겠는가


이별은 사랑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깨어있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렇게 평생을 함께 하면 좋으련만, 이별이 찾아온다. 우리가 어떻게 이별을 받아 들일 수 있을까? 그것은 부모와 다정했던 오빠 혹은 손위 누나와 착했던 여동생 혹은 듬직한 남동생 그리고 깊은 속을 다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와 때때로 지혜로운 조언으로 길을 잡아주던 스승을 한꺼번에 잃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별은 자신의 전부를 다 잃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정신적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면 우리는 공황에 빠져버린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그가 왜 내게 왔고 왜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며 왜 나를 떠나려는지 아무리 이유를 추론하려 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제 사랑과의 이별은 내 전 존재에 대한 부정이다. 이때까지 그 어떤 아픔과 상처보다 큰 고통을 주고  내 존재를 처절하게 짓밟고 비웃는다.  이별 앞에 내 모든 존재가 처절하게 부서진다. 이런 이별 앞에 죽음이나 자살을 생각해본 이들도 많을 것이다. 많은 시간들을 실연의 고통과 아픔으로 정처 없이 방황하며 보냈을 것이다. 다시는 사랑을 믿지 않으며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별을 주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혹은 그 이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견디어 보고자 한때 사랑했던 이에 대해 모든 험담과 비난을 하고, 거짓말쟁이며 사기꾼으로 몰아붙이고 내가 주었던 것들을 다시 가져오라 소리치며 할 수 있는 한 상처를 주려 할지도 모른다. 


어떻든지 이별이 찾아왔다면 우리는 그 이별의 이유를 당장은 알기 어렵다. 사랑에 빠져 있었던 만큼, 사랑에 대해 깨어있지 못했던 만큼 그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성찰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별이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때 이별이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를 묻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다. 이별은 오직 상대방의 이기적이고 상술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부족함도 분명히 원인 중에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기적으로 상술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내게 이별이 왔다면 그것은 길게 보았을 때 내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왔다면 자기 자신을 통찰함으로써 이별이 말해주는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어찌 되었든 사랑의 선택부터 이별까지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내게 더 멋진 사랑을 예약해주는 것과 같다.


사랑과 이별이란 우리 전 존재를 두들겨서 넓혀주고 키워주는 연금술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해서 오는 일이다. 이별의 고통에 빠져 있을 때 한번 생각해보라. 자신이 아이를 낳아 키워서 그 아이가 내 나이쯤 되었을 때 그 아이 역시 사랑에 빠지고 이별을 겪게 될 텐데 그 아이가 격렬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할 때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겠는지. 어떤 말로 그 아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도울수 있겠는지. 이런 사랑의 고통을 겪음으로써 자기 아이의 고통을 이해하고 또 도울수 있게 될 것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별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이 키우던 화분을 되돌려 받는 일과 같다.  

 그때까지 상대가 애지중지 돌보고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며 햇빛을 쪼여주며 돌보던 어떤 존재를 되돌려 받아서 이제는 그것을 전적으로 자기 책임 아래 두고 자기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해 화를 내는 대신 그때까지 그 화분을 돌보아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할 수 있다. 화분안의 식물은 말할것도 없이 자기자신이다.  


이별은 '받아 들임'의 위대한 가르침을 준다.


 이별의 고통이란 결국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을 힘을 다해, 미친 척하고 이별이란 그 현실을 받아들여 보자. 그러면 이별의 고통은 끝난다. 보다 더 빨리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당면한 이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우리를 더 크게 키워내기 위한 위대한 가르침이다. 사랑에는 세가지 스텝이 있다. 첫번째는 주는 것에 대한 것이다.  두번째는 받는 것에 대한 것이다. 주는것과 받는것은 균형의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 가장 중요한 것은 '받아 들임'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은 흔히 알고 있지만 받아들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아주 많다. 많은 경우 '받아들임'에 대해 무지할 때 사랑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난관을 만든다. 사랑하는 이의 어떤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이의 가족을 받아들이는 것, 사랑하는 이의 꿈을 받아들이는 것, 때대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할 때 오는 난제들과 권태 피로 등을 받아 들이는 일이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표현 자체가 공손하고 겸손한 표현이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두 손으로 받아 내 안으로 감사히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반드시 우리를 위대하게 넓혀 주고 키워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의 모든 존재를 긍정해주고 받아주어 우리가 생기있게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펼치게 하지만 이별은 우리가 땅속 깊숙히 뿌리를 내리게 한다. 사랑은 요람이지만 이별은 어둔 방안에 등불을 켜는 손이다. 사랑과  이별중에 달콤한 것은 단연코 사랑이지만 우리를 키워주는 것은 단연코 잘 받아 들여진 이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