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9.
드라이브릿지 마켓은 트빌리시의 오래된 골동품 시장이다. 전 세계의 비슷비슷한 오래된 시장들이 다 그렇듯이 드라이브릿지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흥미로운 장소라는 후한 별점과 관광객을 등쳐먹으려고 한다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
시장은 쇼타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쿠라 강 쪽으로 두 블록 반, 사브루르켄 다리 옆이다. 주변은 조용한 데다 명확한 시작점도 구역을 나누는 표지판도 없지만, 방향만 제대로 잡았다면 여행자들은 곧 시장에 들어섰음을 알게 된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길가에 돗자리나 가판대를 깔고 물건들을 올려놓고 있다. 군복과 구소련 배지와 훈장, 동전, 기념우표는 어디에나 있고 가격이 담합 수준으로 통일되어 있다. 대부분 조지아 것이라기보다는 구소련제다. 여기 나와있는 사람들이 러시아계인 건지 아니면 다들 집에 있는 러시아제 물건들을 빨리 팔아치우고 싶어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 외에 뿔로 만든 조지아의 전통 술잔인 칸치(Kantsi), 다양한 은제 식기들, 황동 촛대, 귀걸이와 브로치, 러시아식 보석함, 손뜨개 인형, 카펫, LP판, 오래된 카세트나 카메라가 있다.
한 할아버지는 새파란 차의 보닛 위에 카메라와 오래된 필름, 돋보기, 안경, 영사기 등을 진열하고 있었다. 그중에 5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아주 오래된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는데, 진짜일까 봐 겁나서 들어보지도 못했다.
물건을 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적극적으로 호객을 하기보다는 가판대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에 앉아 쉬거나, 끊임없이 물건의 배치를 세심하게 정리하거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한참 동안 물건을 만지작거리다가 놓고 가도 눈치 한번 주지 않는다.
홍콩의 할리우드 로드엔 옥장식이, 런던의 노팅힐엔 찻잔이 많은 것처럼 지역의 이런 시장마다 '특산품'이 있기 마련인데, 조지아의 경우에는... 무기가 아닐까 싶다.
장총과 권총은 너무 흔해서 말 그대로 발에 채일 정도였다. 대부분 오래된 골동품이라 실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그 출생부터 장식용이라고 하기엔 군데군데 사용감이 묻어 있는 점이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다행히 조지아의 현재 총기규제법은 엄격한 편이다)
총보다 더 많은 건 칼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것 같은 끝이 가늘고 기이하게 휘어진 아름다운 단도, 날붙이라기보단 거의 둔기처럼 보이는 큼직한 군용 나이프, 녹이 슨 주머니칼. 온갖 종류의 칼이 보기만 해도 뺨을 벨 듯한 서늘한 빛을 뿜으며 끝도 없이 놓여있었다. 관광객들은 섣불리 만지지도 못했다. 그리고 대문짝만 한 스탈린 초상화(여담으로, 스탈린은 조지아 출신이다)나 하겐크로이츠가 박혀있는 군복이 떡하니 널려 있어서 깜짝 놀랐지만, 여기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이런 물건들을 우표나 숟가락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쾌청한 일요일이라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는데도, 시장 바닥에는 서늘한 푸른 그림자가 졌다.
한 시간 남짓 낡고 번쩍거리는 물건들을 헤치며 느릿하게 걸어 다니던 나는 길에서 키가 작달막한 아시아인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조지아의 거리에는 아시아인이 정말 없다. 애초에 관광객 자체가 적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러시아 쪽이 대부분이었다.
삼위일체 교회나 룸즈 호텔 같은, 가장 붐비는 관광지에도 단체 관광객이 두세 팀 정도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가 질 때까지 한국인을 한 명도 보지 못한 날이 꽤 되었고,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열 손가락을 못 채우는 일도 허다했다. 나는 상당히 자주 공항에서, 식당에서, 거리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고, 아이들 옆을 지나갈 때면 나를 따라붙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다.
그러니 이렇게 길가에서 정면으로 아시아인을 마주치는 것-그것도 단체 관광객이 아닌 혼자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대뜸 말을 걸었다.
"니쉬중궈런마?(중국인이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당황해서 기능을 잠시 멈춘 내 머리와는 달리 내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상대의 언어가 흘러나갔다.
"부쉬, 워쉬한궈런(아니요, 한국인이에요.)"
아저씨는 잠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얼굴을 살짝 찡그리더니, 의아하면서도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중국어를 할 줄 아네요!"
그렇다.
나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회화보다는 고전문학 쪽이 특기고 중국어 자체를 안 쓴지도 아주 오래되었지만, 어쨌든 아는 언어다 보니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가 버린 것이다. 중국인이냐는 중국어 질문에 중국어로 '아니요'라고 대답했으니 상황이 좀 이상해지긴 했다. 하지만 국적이 어찌 되었든 일단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자 아저씨는 신이 나서 내게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여행을 왔는지, 학생인지, 어디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물었다.
나는 굳이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었다. 아저씨는 내 대답을 듣는 것보다는 중국어로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는 여기에서 골동품을 사서 중국에 파는 일을 하고 있고,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을 포함해 캅카스에 자주 출장을 온다고 했다. 여기에선 동향 사람을 만나기 힘들고, 더구나 혼자 다니는 사람은 더더욱 적기에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게 너무나 반갑다며 계속 싱글벙글 웃었다.
나도 굳이 말하자면 동향 사람은 아닌데.
하지만 그 동향(同鄕)이 아니라 동향(同向)이 아닐까? 이토록 멀리 오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서, 아저씨는 여기에서 동쪽 방향이기만 하다면 고향으로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늘의 푸른 끝을 바라보면 바다를 그리워하듯이.
이상하게도 리 아저씨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도 아스라이 떠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나로서도 중국어가 러시아어나 조지아어보다 훨씬 편하긴 하니까. 게다가 리 아저씨의 중국어는 특징적인 지역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또렷한 보통화였는데, 그 억양이 나에게 베이징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그건 나에게도 그리움의 맛이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산 물건들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나를 데려갔다. 트렁크를 열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약간 경계했지만, 그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내자 경계심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였는데, 아이보리빛 바탕에 정교한 물고기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상아로 만든 거예요. 진짜 상아로. 옛날에."
굳이 아저씨가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골동품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내가 봐도 이것은 진짜 상아고, 적어도 공산품은 아니며, 확실히 오래된 것이라고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뒤이어 신문지에 감싼 아주 황동 빛의 우아한 조각상을 꺼냈다. 전체는 팔 길이 정도로, 긴 옷을 두른 늘씬한 여성을 조각한 것이었다. 아저씨는 지역에서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라며 그 이름을 말했는데, 불행하게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리 아저씨가 조각상을 높게 들어 보이자 도로 옆에 가판대를 차려놓고 앉아있던 조지아인 할아버지가 물건을 보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기껏 낡은 양말이나 실로폰 정도였는데, 대체 이 물건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저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파는 물건은 대부분 중국에서 온 거예요. 소련 시절에 들어온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중국 공장제죠."
그는 수량이 매우 많은 공산품, 즉 똑같이 생긴 촛대 같은 것은 대부분 가짜고, 이 메인 거리에 '진짜'는 거의 없다고 일러주었다. 기념품으로 산다면 모를까, 비싼 값을 치를 만한 물건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그의 조언을 마음에 새겼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어서, 그와 느긋하게 헤어졌다. 리 아저씨는 계속 아쉬워하며 식사 초대라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다음날 귀국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뒤로 열심히 가판대를 둘러보았지만 상아로 만든 상자 같은 건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럴듯한 것을 발견해도 "여기 있는 것은 다 중국에서 온 거예요"라던 아저씨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 결국 골동품을 사가는 것을 포기하고 짧고 기이하지만 만남만을 얻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라이브릿지 마켓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져온 것이 중국산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