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더 Oct 31. 2020

그리고 1년이 지났다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 30.


1년이 지났다.

이름조차 낯선 나라에 끌려서 떠났고, 그곳의 바람과 먼지를 묻힌 채 돌아왔던 것이.


이제 그 건조하고 이국적인 흔적은 내게서 떠나간 지 오래다. 여러 번의 세탁과 갑자기 쏟아진 독한 세제 같은 시대의 흐름 덕분에. 

사실 나는 연초에 신변을 정리하고 조지아에 다시 가서 머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계획은 허물어졌다. 물거품이 되었다. 아니, 그보다는 '산산조각 났다', 혹은 '유리잔이 모래알처럼 깨지듯이'라고 해야겠지. 그 계획의 잔파편들이 아직도 내 발밑에 반짝반짝하게 깔려 있어, 어느 방향으로 내딛든 발바닥에 상처를 낸다. 


만약 -----했더라면, 지금쯤 나는....



그 생각만으로 어느새 1년이 지났고, 나는 그 시간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돌아보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1달 후, 1년 후, 백신이 나오면, 상황이 좋아지면, 하는 미래의 시간도 그릴 수가 없다. 그건 이미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때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비관이다. 그건 비굴하고 잔인한 자해와도 닮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그냥 꿈이었고, 일어나지 않았던 일과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아니면, 그 여행은 그럭저럭이었고, 네가 좋았다고 여긴 건 지금의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환상이었을 뿐이야.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솟을 때마다, 언제나 들고 다녔던 작은 수첩을 펴본다.



거기엔 여러 가지 기억이 들어있었다.


전부 처음 먹어보았지만 맛있었던 음식들, 표지판도 울타리도 없는 오래된 성벽에 내려앉는 햇빛의 온도, 주택가의 담장 너머 붉은 보석처럼 터져 나오는 석류의 향기, 가로수 아래에 다리를 쭉 뻗고 자는 개들을 볼 때마다 어쩐이 웃음이 나던 것, 테라스가 있는 식당 앞을 지날 때면 들리던 와인잔이 찰그랑 찰그랑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 그렇게 낯설면서도 어쩐지 벅찼던 느낌, 새벽녘에 돌연 유리창을 때리는 빗소리마저 편안했던 것....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이를테면, 돌아오기 전 내가 조지아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은 공항에 있는 던킨 도넛에서 산 도넛이었다. 그 도넛 이름이 무려 '조지아'였기 때문에 안 사 먹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이 나라 한정 도넛이란다) 하얀 설탕 코팅 위에 조지아 국기를 연상시키는 붉은색 무늬가 대충 그려져 있었다. 안에는 라즈베리 잼이 가득 들었다. 

특별한 것 없는 설탕 덩어리의 맛이었지만, 천천히 먹으면 출발 시간도 느리게 다가올 것처럼 아주 오래도록, 느릿하게 먹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을, 흘러가는 생각과 조그만 감정들을, 카페 테이블에 팔꿈치를 받치고, 덜컹거리는 조수석에서, 성벽에 기대앉은 채로, 그때그때 썼던 짧은 문장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이어 붙이고 조금씩 엮어나갔다.


모든 것에 빠져드는 비관이 덮쳐올 때, 유일한 위안이 될 수 있도록.

1년 동안 그랬듯이, 기약 없는 앞으로도. 

이전 29화 드라이브릿지 마켓의 중국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