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이지만 신입 무기 계약직입니다 (5)
억울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한 것이 없이 피해를 입어 속이 상하고 답답하다이다. 사람마다 제각각 억울함을 느끼는 포인트는 다르겠지만 누구라도 한번 억울함을 느끼면 분노나 슬픔, 기쁨을 느끼는 것보다 더 오랫동안 그 감정이 남아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무궁무진한 억울한 상황들에 직면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업무 성과를 뺏겨서 억울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고, 동료와의 의견 충돌로 인해 오해를 받아 억울함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B사에 근무할 때, 정말 억울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다.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가 갑질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제가 갑질을 했다고요?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들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내내 갑을관계에서 을의 입장을 대변해 왔던 내가 무슨 이유로 회사에서 갑질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을까? 심지어 나는 B사에서 신입 무기 계약직이었는데 내가 어떤 갑질을 할 수 있었던 걸까?
황당하기만 한 이유들이 나에게 갑질이라는 프레임을 씌웠고, 나는 억울했지만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당하는 것 밖에 없었다.
B사는 주 6일 근무제였다. 매일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1, 2회 정도는 꼭 바쁜 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 직속 상사인 홍보팀 과장의 제안으로 회사에서 주 1회만 출근해 내가 맡은 업무를 서포트해 주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주었다.
그 당시의 나 (지금이라면 절대 안 그럴 것이다. 지금 나는 많이 변했다)는 대학생 때부터 각종 아르바이트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온 학생이 너무 예뻐 보였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생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었고, 일 하러 와준 것만으로도 애정이 갔기 때문에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아르바이트생에게 처음부터 너무 잘해주려고 했던 것이 내 실수였던 것 같다. 나는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사비로 산 간식거리와 음료를 챙겨다 주거나, 혹시 내가 시키는 업무가 힘들지는 않은지 계속 물어보고, 일할 때는 마음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말을 해주고는 했다.
그런 나의 행동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모양이다. 아르바이트생은 주 1회 출근을 하면 내 업무를 도와줬어야 했는데, 내 업무는 내가 계속하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서포트를 부탁해도 일은 뒷전으로 하고, 본인의 시험공부 책을 펴놓고 공부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업무 설명을 좀 더 해주는 방향으로 하고 일단은 지적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고용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을 맡겨야 하는 포지션이 된 게 처음이라 똑똑하게 대처하지 못하다가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책을 펴놓고 공부만 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나는 결국 업무 시간에는 책 펴서 공부하지 말고 업무에 신경 써 달라는 말을 했다.
지금 갑질하시는 거예요?
내 이야기를 듣던 아르바이트생이 꽥하고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할 말을 잃었다. 갑질은 권한이나 영향력을 행사하여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인데, 아르바이트생에게 책 펴놓고 공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갑질이라니, 나는 황당했다.
바로 직속 상사인 홍보팀 과장에게 이 일을 보고 하자 과장은 대수롭지 않게 "알바생한테 그냥 잘해 주세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죄송하지만 이 일에 대해 내가 잘못한 부분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고, 과장은 앞으로 아르바이트생 관리는 본인이 직접 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그렇게 나는 아르바이트생 관리에서 손을 뗐고, 정확히 2주 뒤 아르바이트생은 이번에는 과장이 자신에게 갑질을 한다며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고 했다. 과장과 아르바이트생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아 묻지도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이 얼마나 귀하게 자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살면서 갑질했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 나는 한동안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억울했다. 내가 갑질을 했다니...
정말 갑질 비슷한 거라도 해보고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억울한 일은 불행하게도 반복이 된다. 나는 또 한 번 회사에서 갑질을 했다는 오명을 써야만 했다.
나는 업무상 대외적인 온라인 홍보를 담당하는 대행사 사람들과 소통을 하는 일이 잦았고, 한 달에 한번 월보고를 받아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홍보 대행사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담당자들이 얼마나 힘들지 고충이 이해가 돼서 더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러나 계약 조건은 일정량의 온라인 홍보를 해주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게 전혀 커버가 되지 않았고, 보고서는 지난달 내용으로 오거나, 보고 내용이 부실하거나 오탈자 투성이라던지 업무적으로 여러 가지 보완해야 할 사항들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홍보 대행사 담당자에게 계약에 맞게 온라인 홍보 일정 맞춰서 해달라는 것과 보고서의 잘못된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화낼 일이 아니었기에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낸 적도 없고, 전화를 한 적도 없으며 메일로 해당 내용을 전달했을 뿐이었다.
00 씨, 요즘 세상에 갑질하면 큰일 나!
모니터 자판을 두드리던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홍보팀 과장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네? 저요?"
과장은 홍보대행사 측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대행사에게 요구한 사항들이 갑질이라며 요즘 세상에 갑질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나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내가 계약 내용과 다른 업무 내용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을 하자 그건 과장 자신이 말해서 다음부터 계약 내용 잘 지키게 하면 되는 거라면서 별일 아닌 거 가지고 지적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다 갑질이고 권력 남용이라고.
나는 억울했다. 갑질이라는 게 이렇게 별거 아닌 거였나? 내가 한 행동이 갑질이라면 그동안 내가 당해온 것들은 경찰서에 신고하고 검찰에 고소라도 해야 되는 건가. 나는 아무 말도 하면 안 되는 존재인가, 나는 정말로 갑질을 한 것일까?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이건 훗날 내가 퇴사를 할 때쯤에 들은 이야기인데 홍보팀 과장은 대행사한테 커넥션을 받고 있고 명품백도 받은 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의욕이 앞섰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고, 업무도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들은 본의 아니게 갑질이 되었다.
사실 난 그저 아르바이트생에게도 홍보 대행사 담당자에게도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되는 무기 계약직일 뿐이었던 걸까. 업무가 잘못되는 것도 나와는 관계가 없으며 어차피 다 과장 업무인데 내가 서포트하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었을까.
그렇게 나는 점점 업무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