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어린 시절의 나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실은 얼마 전에야 떠올렸다. 삶에서 인격이 형성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은 4살에서 5살이라고 하던가, 나는 그때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비단 어리기 때문은 아닌 것이, 그 전의 기억은 드문드문 있다. 엄마와 손잡고 꽃구경을 갔던 기억, 티브이 앞에 앉아 텔레토비를 보던 기억 등이 오래된 필름 영화처럼 남아있다. 그런데 그 시기의 기억은 유독 없었다. 그다음은 6살이다. 동네의 어린이집에 간 기억, 곧 초등학교에 입학한 기억, 그렇다면 그 사이엔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엄마 나 사랑해?”, “엄마 혹시 나 때문에 서운한 거 없지?” 등 무척 자주 하던 이야기였다. 나는 이상하게, 특히나 엄마에게 조금만 불안해지면 사랑을 확인받으려 했다. 혹은 엄마의 기분이 조금만 안 좋아 보이면 그게 모두 내 탓인 것 마냥 느껴져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무언가를 숨기고, 남을 눈치 보이게 할 성정의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했고 거짓말을 못 한다. 그럼에도 난 늘 엄마의 마음을 떠보고 혼자 불안해지고 말았다,
나는 4살부터 이모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외할머니의 언니였다. 자식이 없으셨던 할머니는 늘 나를 친손녀처럼 예뻐하셨고 부모님이 일 때문에 나를 돌보기 어려워지셨을 때 당신이 맡으시겠다며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시절 기억은 거의 없었다. 그냥, 주말에 엄마가 데리러 오면 그 이틀을 엄마와 보내다가, 다시 헤어져야 하는 일요일 밤이 오면 엄마 옷자락을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울던 기억만 난다.
그런데 최근 떠올랐다. 가족들과 이미 돌아가신 이모할머니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어렸던 내가 그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할머니가 좋아, 너희 엄마가 좋아?”, “할머니 죽으면 얼마나 슬플 것 같아?” 등이었다. 이 장면이 생각나니 그 뒤는 물밀 듯 금세 기억났다. 엄마가 더 좋다 했다, 그랬더니 며칠을 서운해하며 그럴 거면 네 엄마에게 가라고, 키워봤자 소용도 없다고 매일 눈치를 줬다.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죽으면 어떨 것 같냐는 물음에는 어떻게든 눈물을 짜내야 했다. 그냥 슬플 것 같다고 하는 말은 믿지 않았다.
집 근처에 등촌칼국수 본점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곳을 좋아하여 자주 가셨다. 내 밥도 자주 포장해 오셨는데, 그날도 볶음밥까지 모두 포장해 오셨다. 나는 하필 속이 좋지 않아 못 먹겠다고 했다. 그러니 무척 화내며 못 먹으면 먹지 말라고, 됐다고 말하고는 온종일 찬바람이 불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어린 몸으로 하루 종일 할머니 눈치를 보며 소파에 쭈그려 앉아 있다가, 그 뒤부터는 아무리 속이 안 좋아도, 배가 불러도 먹었다. 언젠가 엄마가 “엄마, 나 너무 배부른데 밥을 계속 먹으라고 줘서 몰래 토했어.”라는 내 얘기를 듣고 너무나 속상했다고 한다.
금요일 저녁은 엄마가 날 데리러 오는 날이었다. 나는 금요일 아침부터 신이 나 엄마만을 기다렸다. 할머니는 또 그걸 느끼면 내게 눈치를 주며, 네 엄마 오는 게 그렇게 좋디? 아우 서운해. 하시면서 냉기를 풍기고는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할 때도 그랬다. 일주일 동안 할머니 눈치가 보여 수화기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가끔 “엄마, 나 몰래 전화하는 거야.” 하며 전화 너머로 속삭이던 내 목소리가 기억난다고 한다. 어느 날은 또 엄마를 기다리는 내 모습에 할머니가 토라졌던 것 같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엄마가 본 풍경은, 식탁 위에서 자그만 몸으로 혼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는 거실을 등지고 앉아 물 만 밥에 김치 하나만을 두고 식사하던 내 모습이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무척 당황했고, 엄마는 그날 더 이상 날 그곳에 두면 안 되겠다고, 데리고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동네 어린이집을 수소문하여 10일도 되지 않아 날 데리고 왔다. 그때가 5살 중반 무렵이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도 5살이 완전히 지나기 전 원래의 보금자리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신기했다. 나는 그 후로 20년을 넘게 한 번도 그 시절이 떠오른 적이 없다. 내가 유독 남의 눈치를 심하게 보고, 상대의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려 하고, 실은 서운해하는 건 아닐지, 불편한 건 아닐지, 신경 쓰는 사실은 알았다. 알다 못해 내 평생의 스트레스였다. 내 안의 어린 나였던 거다. 이 생각만 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흐른다. 인식하지 못하던 그 오랜 세월 동안, 조그맣게 살아 숨 쉬던 그 아이는 일주일에 5일을 낯선 집에서, 불편한 공기에서, 부당한 핍박에서 견뎠다. 그때를 지우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아니 내가 똑바로 보였다. 나의 본래 성격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주변이 다르게 보였다. 나는, 모든 사람은 발화 뒤로 진정으로 원하는 다른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님을 알았다. 이걸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최근의 시간은 내가 살면서 느낀 나날 중 가장 편안한 순간이었다. 계속 아이에게 말한다. 그러지 않아도 돼, 이제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아, 고생했어,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도 돼.
내 안의 어린아이를 찾아보자. 애틋하고 안쓰럽고, 그럼에도 버텨냈던 그 아이를, 다가가 안아주고 싶다. 그 아이의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그렇기에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안다. 위로해 줄 수 있다.
이제는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고 싶다. 잘 커서 다행이다. 그 아이를 마주해서, 무척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