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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엔, 내가 사랑한 풍경이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by 장원희

날이 갈수록 즐거운 일들이 적어진다.

10년 넘게 밤을 새우며 몰두했던 게임에도 어느 순간 흥미를 잃었다. 온종일 읽던 웹소설도 이제는 거의 읽지 않는다. 만화도, 영화도 이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남는 시간에 할 일을 잃어갔다. 예전 같으면 게임을 하거나 다른 취미 활동을 즐길 시간에 요즈음엔 가만히 누워 자거나, 생각을 한다. 무기력해진 걸까, 무던해진 걸까, 무엇이든 인생의 즐거움을 잃어 가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앞으로 얼마나 더 내게 남은 열정이 사라질지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해졌다.


취미 중 하나는 산책이다. 하릴없이 한가한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을 좋아한다. 아직 건재한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로 요즘도 쉽게 하루에 만 보를 넘게 걷고 있다. 걷다 보면 많은 풍경이 보인다. 세월이 느껴지는 담장 위 온통 빨갛게 핀 장미, 수업 중인 초등학교 옆 얕은 내리막길에 적힌 ‘어린이보호구역’이라는 글자, 동네의 가게 앞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어르신들, 모두 내가 좋아하는 장면이다. 길 위엔, 내가 사랑하는 풍경이 사방에 가득하다. 그렇게 하나 둘 눈으로 좇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훅 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버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또 어떤 것들에 무감각해져도, 이 모습들만은 늘 내게 즐거움을 주겠구나. 우울한 날이든, 지친 날이든, 혹은 아무 일 없는 평온한 날이더라도 거리를 거닐며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는 순간, 지금처럼 벅차고 기쁘고, 행복할 것이다. 그건 참 나를 안심시켜 주는 깨달음이었다. 언제든 변함없이 내게 행복을 줄 순간이 존재할 거란 믿음 말이다.


좋아하는 풍경들을 마주했을 때 느낌은 뭐랄까, 그 순간이 내 추억 속 아름답게 포장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나는 담장 위 장미를 보며 오래전 갔었던 시골 마을을 거니는 마음이 되고, 초등학교 옆 골목을 걸으며 어렸을 적 아이들과 방과 후에 뛰놀던 그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의 몸으로 다시 걷는 기분. 그 연상(聯想)에서 오는 기쁨들, 생각해 보면 나의 즐거움은 점점 줄어갔지만 이제 나는 그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즐겁다.


추억을 되새기는 어떤 순간들은 슬프기 마련이었다. 돌아가지 못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풍경들을 접하며 맞닿는 추억들은 슬프지 않았다. 단순히 회상하는 걸 넘어, 그때를 다시 한번 내 발로 걷고 온몸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앞의 골목을 걸을 때면 기억 속 장면에서 안 가본 길을 가는 것 마냥 두근대는 마음도 들었다.

나는 시간을 때우려 가만히 누워있을 때도 자주 추억에 잠긴다. 다만 이 때는 조금 슬플 때가 있다. 지나간 행복들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걷는 건 다르다. 둘 모두 같은 ‘회상’이지만, 조금은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걷는 회상은 추억 속 장면을 다시 살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이어져, 결국 ‘살아온 나’를 돌아보게 했다.


내가 나온 어린이집을 보고, 초등학교를 본다. 자주 가던 음식점을 보고, 매일 걷던 하굣길을 본다. 돌이켜 보니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살아온 흔적이었다. 그 흔적들 앞에서, 나는 오래된 편지를 꺼내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자기가 이만큼 큰 어른이 될 거라는 걸 몰랐겠지. 그때 내게 나는 영원히 아이였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그 시간들이 소중한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그 모든 순간에 있던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끝내 지났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회상을 넘어 살아온 나를 되짚는 일이었다.


걷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걸 되돌려준다. 잊은 줄 알았던 시간들, 지나온 나의 마음들.는 그 위를 다시 걸으며, 잃어버린 즐거움 대신 남은 풍경들을 바라보고, 지나간 추억들 사이로 지금의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한때는 사라져 버린 줄만 알았던 마음들을, 아직도 그 길 위에서 천천히 만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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