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넌 사주에 화는 무조건 있을 것 같아.
재미로 다들 사주를 볼 때, 한 번씩 들은 말이다. 사실 난 사주를 보지 않아 화가 정확히 무엇인진 모른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물어보니 씩씩해서 그러더란다. 나는 정말 화가 두 개 있었다. 웃긴 건 그 자리에 있던 6명 중 나를 제외하곤 다들 화가 하나도 없었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 핸드폰 어플로 간략히 본 사주이기는 하지만 나름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는 웃으며 넘겼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참 오래전부터 이 불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도 나는 화(火)가 많다. 특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누군가의 사고에 그랬다.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불러온 마음에 화가 났다. 어떻게 사람이 저러지, 하는 생각을 골백번도 더 한 것 같다. 사실 이도 참 웃기다. 나와 가치체계가 다른데 나에 맞추어 재단하는 꼴이었다. 화가 많은 성격으로 살아가는 건 참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다. 부당한 일에도 화가 나고, 거기에 화가 나지 않는 이를 보면서도 화가 난다. 그냥 좀 넘어가자는 소리를 듣고, 네 일이 아닌데 왜 그러냐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나는 더 나에게 떳떳하게 행동한다. 비겁하지 말자,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자, 내 정신건강을 위해 늘 지키는 항목이다.
요즘에야 안 건데, 어떤 이들은 화를 창피하게 여긴다고 한다. 참지 못해서 하는 행동이니, 성숙하지 못 한 태도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는다는 건 화남이 전제되는 행위다. 이 면에서 봤을 때 나는 화가 실제 성향보다는 없다고 파악될 수 있겠다. 나긴 하지만 내진 않는다. 이걸 익히기에도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욱하지만 참는 일, 부당하지만 당장 화를 표출하기보다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하는 일, 내 화가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화를 (내는 것을) 창피하게 여긴다는 마음은 이해 간다. 그런데 정당한 분노조차 ‘예민함’이나 ‘오버’로 여겨 화 자체를 창피하게 여기는 마음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화가 많은 ‘예민한’ 나 또한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을 좋아한다. 내는 사람 말고, 화를 느끼는 사람. 잘못된 걸 알아채는 그 마음이 늘 반갑게 느껴졌다.
가끔은 이 화 때문에 상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학원 일을 하며 오지 않는 아이들에게 연락한다. 그 아이는 다른 학원 시간을 바꿔 이제 다른 요일에 와야 한다고 했다. 원장님께 전달했다. 무려 4주 동안, 4번을 말이다. 그런데 어째 전달할 때마다 기억을 못 하신다. 네 번째엔 표에 기록까지 하시기에 5번째엔 아이에게 연락을 안 했다. 그랬더니 내가 무려 4번이나 전달한 사항은 또 잊어버리시고 이런 건 꼭 확인했을 때 말씀해주셔야 한다고 한 마디 하신다. 어땠을까, 억울했지만 참았다. 나는 어떤 나보다 거대한 대상의 불합리하거나 부도덕한 행위에 의한 화는 어떻게든 표출을 하는 편이지만, 개개인의 관계에서는 이제 잘 참는다.
하지만 계속 억울하긴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제야, 50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의 개인 교재를 하나하나 만들고, 일정과 진도 등 모든 것을 신경 쓰고 관리하는 원장님이 눈에 보였다. 얼마나 바쁘셨을지, 그간 원장님이 자잘하게 전달 사항을 잊어버리던 모습이 이해됐다. 이해를 넘어 안쓰럽게 느껴졌다. 혼자서 늘 전쟁을 치르고 계셨다. 그 뒤엔 원장님이 또 억울한 일로 뭐라 하신들 그냥 웃으며 대답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정수 중 하나는 바로 이 ‘화’가 아닐까. 욱하기에 실수했고 그를 통해 성장했다. 어쩔 땐 욱해서 보여주기 위해 열심히 했다. 사회의 잘못됨을 느끼고 이야기하며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으며 나와 같은 이들과 유대감을 다지기도 했다. 한 때는 화가 많은 게 참 힘들었다. 그때의 불같은 감정은 내 마음을 태워버릴 것 마냥 이성을 흔든다. 그걸 느끼는 순간들은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늘도 그랬다. 자주 갔던 식당의, 심한 무례들에 순간적으로 화가 나 마음이 불밭이었다. 이젠 안다. 그럴 땐 절대 입을 떼면 안 된다. 무사히 참았다. 덕분에 사장님을 보다 알았고, 곧 사장님의 특징이 머릿속에 하나 더 정리됐다. 이젠 어떤 준비 없이 다시금 맞닥뜨리진 않을 테니 그런 일로 전처럼 화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종종 화를 통해 세상을 배웠고,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직도 자주 화가 난다. 그건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더 나은 관계가 되고자 한 바람. 화는 그걸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오늘도 화를 참으며 다짐한다. 불필요하게 타오르지 않기 위해, 그러나 꺼지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