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우리 집 골목길 늘 같은 자리에 주차 돼 있는 차 아래엔 고양이들이 산다. 한 마리 일 때도 있고 세 마리가 모여 있을 때도 있다. 마주할 때마다 눈짓으로 고양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게 소소한 낙이다.
그날도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편안하게 늘어져있는 세 마리를 만났다. 인사하다 말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들은 매일 무엇을 하면서 지낼까, 하염없이 늘어져 있는 삶이 지루하지는 않을까. 그도 그럴게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고양이들은 늘 똑같은 모습, 자세로 같은 곳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일과를 떠올려 보아도 하루 중 20시간은 그 자리에서 밥을 먹거나 드러누워있을 장면만 그려졌다. 늘 내가 보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루하지 않고, 가치 있게 하루를 보낸다고 평가한 기준은 무엇인가?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어제보다 나아진 내가 되어야 제대로 하루를 보냈다고 여기는 걸까. 어느 휴일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종일 침대에 늘어져 자고 깨고,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낼 때가 많았다. 그때의 내게 지루함 같은 건 없었다. 편안함과 행복함만이 가득했다. 매일을 그러고 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도 한 것 같다. 휴일이 길어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모습은 내가 혹여나 지루하지는 않을까, 저 아이들을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걱정하던 고양이들과 똑 닮아있었다.
나는 언제부터 무의식적으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행위들을 가치가 없는 것,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됐던가. ‘의미 없는’ 내 행동 속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 쉬는 동안 더없이 행복했고 그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 가족과 함께 쉬는 날이면 더 그랬다. 여기서 한 번 셋이 모여 늘어져있던 고양이들의 모습이 또 떠올랐다. 이게 그 아이들의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자 함부로 추측했던 일이 멋쩍어지는 동시에 왜 많은 사람들이 고양이의 삶을 부러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끔 내 삶을 돌아보며 후회에 잠긴다. 대개는 이런 식이다. 10년을 하루 중 절반동안 쓸모없는 삶을 살았구나. 그럼 나는 거의 5년을 버렸구나. 그런 생각 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던가? 내가 멋대로 산정한 5년의 ‘무가치’한 삶에서 나는 분명 즐거웠고, 행복했다. 생각이 이어졌다. 나는 왜 사는가? 결국 그 5년을 생산적으로 보내어 얻고 싶은 것도 내가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였다. 5년을 버린 게 아니다. 어떤 하루여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며 내가 만든 나만의 하루였다.
아직도 ‘무가치한’ 하루를 보내고 있자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며 자꾸만 지금 쉬지 않았다면, 놀지 않았다면 끝낼 수 있는 일을 생각한다. 그렇기에 한 번씩 되새긴다. 가치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발전적인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쉼으로 얻을 수 있는 행복은 큰 가치이며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는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 하루를 허투루 보냈다 후회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행복했어? 네가 행복했으면 된 거야.”
가끔 우리는 자신에게 무척 엄격하다. 행복했으면 된 거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따지는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은 그날의 내 마음은 어땠는지이다. 눕고, 웃고, 하릴없이 보내는 그 모든 순간은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는 충분히 괜찮은 하루를 산 거다. 고양이처럼,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하루도 있다는 것을. 나도, 너도, 그렇게 조용히 살아내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마음 편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