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있으니까
공부하라고 보내놓은 학원에서 출석체크만 하고 한겨울 벌벌 떨며 옥상에 앉아 핸드폰 게임하기, 술 마시자는 연락에 자정쯤 기어나가 매일같이 친구 집에서 아침을 맞기, 주취자로 파출소 신세를 지며 경찰분들과 안면 트기.
모두 해 본 것들이다. 솔직히 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듣던 말은 샛길로 새지 말고 정석대로, 미련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얼마 전에는 수업 중 출석 인원을 호명하시면서 얼굴은 확인하지 않으시는 교수님의 모습에 친구에게 와, 내가 너 안 왔을 때 대신 대답해도 모르실 듯? 했다가 곧바로 제발 그런 생각 좀 하지 마.라는 애원을 들었다.
남에게 해가 되거나(우리 엄마 속 태우기 빼고) 범법인 것을 제외하면 내 인생에 한해서는 참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하기 싫은 건 죽어도 하지 않았다. 물론 시기별로 그 정도는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 작년은 조금 심한 해였다.
오랫동안 여러 일로 흔히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스무 살 청춘의 삶을 살아본 적 없었다. 술 마시다가 막차 끊기기 등의 일 말이다. 작년에야 제대로 다시 학교를 가며, 동네에서 알바를 시작해 근처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매일을 밤늦게까지 친구와 함께 놀고, 수다 떨고, 술 마시고, 밤거리를 걸었다. 즐거웠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단순히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보다는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그러나 늘 관념적으로 그려지던 청춘의 모습을 지금 내가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족했던 듯했다. 아주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엄마 속을 얼마나 자주 썩였는지 모른다. 내 생각에는, 아마 공부 안 하고 뺀질거리고 몰래 게임만 하던 시절보다 더 속이 탔을 거다.
이상하게 늘 그런 것들은, 한 번 해보고 나면 전만큼 즐겁지 않았다.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슬슬 지쳤고 가끔 집에서 아무 일 없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너무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가는 게 귀찮아졌고 누가 9시만 넘어서 연락해도 너무 늦었다는 마음이 들었다.
앞서 말한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도 그렇다. 어땠던가, 엄마랑 같이 나가 학원가는 척하며 헤어진 후 다시 집에 돌아와 에어컨 틀고 자기, 기껏 1인실로 끊은 프리미엄 독서실은 카드만 찍고 곧바로 뒷문으로 슬쩍 나가 PC방으로 향했다. 뛰면 3분 거리, 엄마가 데리러 오기 5분 전에 출발하면 딱 맞았다. 정말 평생의 게임을 다 했다. 이때에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단순히 공부가 하기 싫고, 게임이 재밌었다기보다는 그냥 그, 규율에서 벗어난, 무언가 자유로워 보이는 내 행동이 좋았다. 실제로 이제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자유로워진 신분인데, 오히려 모든 걸 내 뜻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니 알아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무척, 스스로 잘한다. 과제도 공부도 소소한 작은 일정들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챙기고 약속도 일정에 맞추어 잡는다. 학점도 만점이고 무엇이든 밀려본 적 없고, 학원 일도 워낙 성실하게 준비해 가는 탓에 원장님께 “선생님은 습관 자체가 남다르신 것 같아요, 짱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한 번도 이런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됐다. 나는 내가 모든 걸 다 해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살려서 내버려 둔 엄마에게도 감사하다. 오늘날에야 알게 됐는데 학원 땡땡이 독서실 땡땡이, 엄마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토록 자유를 느끼며 살아본 탓에 더 이상 갈망하는 자유가 없다. 오히려 이제는 스스로 할 일을 찾아 알맞게 수행할 때 모든 환경을 내가 성공적으로 조성했다는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
흔히 일탈을 걱정한다. 공부 안 하는 것을 걱정하고, 공부가 하기 싫은 것을 걱정하고, 너무 밖으로 나도는 것을 걱정한다. 그러다 잘못될 것 같기 때문에,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그 시기가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내 적성에도 안 맞고 더 이상 재미도 없다. 자유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도, 딱히 모범적인 생활을 하진 않는다. 학교도 요령껏 뺄 수 있는 날이면 가지 않으며, 각종 일들도 미련하게 하기보다는 머리 써서 최대한 덜 고생하며 한다.
이토록 자세히 내 소소한 일탈들을 써놓은 까닭은, 혹시 하나라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그로 인해 고민 중인 이들에게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결국 나는 돌아왔다. 해보고 나니 더는 그쪽으로 끌리지 않았다. 일탈은 끝이 아니라 방향을 알려준 지도였다. 누군가의 ‘바람직함’이 아니라 내가 고른 속도로 걷는 일이 내게 맞았다.
그래서 말해주고 싶다. 잠깐의 우회로가 꼭 실패는 아니라고, 그 길에서 배운 감각이 언젠가 네가 스스로 정한 규칙을 지키게 해 준다고. 하고 싶은 대로 살던 내가, 이제 해내고 싶은 대로도 산다. 그게 내가 배운 자유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