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저기도 우영우 투성이다. 버스 정류장에 붙여진 광고를 봤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유명한 드라마가 될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온 나라가 한 드라마에 열광하는 현상도 참 오랜만이다. 내 기억으로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이후로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 않나 싶다. '어남택'과 '어남류'. 두 파로 갈라졌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다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 권민우와 정명석, 두 이름으로 뜨겁다.
굳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풀네임 대신 '우영우' 이름 세 글자를 쓴 이유는 우영우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우영우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내가 처음으로 만난 '우영우'는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아이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몇 마디 괴성을 지르는 게 전부였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걸을 때마다 배배 꼬인 다리는 위태 위태하게 흔들렸다. 첫 학기, 우리 반 전체에게 선생님이 내린 숙제는 그 아이와 함께 점심시간에 식당에 데려다주고, 같이 밥을 먹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1번부터 끝번까지, 번호순으로 당번을 정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차례가 오지 않기를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빌었다. 변명하자면 나는 반에서 친구 하나 없는 왕따였고, 그 아이와 밥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럽지만 내 위치는 바닥을 칠 것 같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 아이를 급식실로 혼자 보낸 채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다. 학년이 바뀌고, 반도 바뀌면서 첫 번째 우영우와의 연은 그렇게 끊어졌다.
두 번째 우영우, 아니 어쩌면 제일 처음으로 만난 우영우의 이야기가 남았다. 그 우영우는 우리 친척이었다. 친가와 외가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던 나와 동생은 사는 곳으로 친척들을 구분하곤 했다. 가령 아파트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는 '아파트 할머니', 시골에 사시던 친할머니는 '시골 할머니'. 시골 할머니 집에 가면 고모가 있었다. 고모는 말이 어눌했다. 어린 나의 시선으로만 봐도 고모는 다른 사람과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은 어렸을 적 고모는 감기로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고, 그 후로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정도다.
시골집에 가면 늘 봉지 신라면 묶음이 쌓여있었다. 머리가 좀 더 커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라면들은 지방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 보내준 일종의 지원물품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집에서 잘 먹지 못하게 하는 라면들이 쌓여있다는 사실이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드라마 속 영우가 친구를 만날 때면 항상 하는 '우 to the 영 to the 우' 인사법처럼, 고모에게도 고모만의 인사법이 있었다. 고모만의 독특한 인사법은 바로 '포옹'이었다. 명절을 맞이해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가면 우리의 흰색 마티즈를 기다리고 있었던 고모는 먼발치에서 달려 나와 우리를 꽉 끌어안곤 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불편함 정도는 알 수 있다. 우리 고모가 다른 고모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고모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눈치라도 챈 듯, 전과는 달리 포옹 대신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를 볼 때면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어보던 고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말수가 줄었다. 고모에게는 아들도 있었다. 어렸을 때 한 번, 다 크고 나서 한 번 봤던 그 형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바로 일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많아봐야 나와 5살 정도 차이가 났을 그 형은 역시 우리 집안사람답게 낯을 무척이나 가렸다. 나와 동생을 동네 개울에 데려다주고 우리가 노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그 형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어른이 되고 나서였는지, 아니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우영우들은 사라졌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고 지나친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겼는지는 모르겠다. 티비 속에 나오는 영우의 곁에는 항상 동그라미라는 좋은 친구가 함께했다. 나는 한 번도 영우에게 동그라미였던 적이 없었다. 나는 늘 뾰족하게 각져있는 세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