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란에 에디터라고 당당하게 적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명함에 박힌 '에디터'라는 세 글자를 보며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나 진짜, 이 일로 먹고 사는구나. 약 10년 전, 굳이 굳이 힘겹게 진학한 자사고에서 공고로 전학을 가겠다며 떼를 쓰는 애를 보던 부모님도 아마 그제서야 나와 같이 숨을 돌리지 않으셨을까 싶다. 아마 세상의 모든 직업들이 다 그렇겠지만, 에디터라는 직업이 주는 화려한 첫인상과 실생활은 영 딴판이다.
텅 빈 백지를 채워야 하는 화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에디터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전달하는 게 맞는 방법인지 하루 종일을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고민하다 보면 왜 예술가들이 단명할 수밖에 없는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재난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소재 고갈'의 손을 번쩍 들어줄 자신이 있다. 아무리 세상에 널린 것이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이라지만, 그 안에서도 상품성을 가진 나름대로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낸다는건 한숨만 나오는 일이다.
이 직업을 가진 지도 이제 겨우 1년하고도 반을 넘긴 애송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에디터의 장점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인플루언서나 배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것. 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에디터가 하는 일이자 장점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배우의 이야기를 1대 1로 듣는다거나, 평소 좋아하던 아티스트에게 다음 앨범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 스파크가 튀기는 순간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내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셀럽들의 결혼 생활이나, 음악 취향이라면 몰라도 서울에 사는 평범한 20대 남성의 취향을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조금은 슬퍼지기도 하지만, 나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의 취향을 알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든 적이 없으니 결국 누구나 똑같다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 직업으로 먹고 살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마음 한구석엔 언제든지 어디론가 떠나버리겠다는 생각을 품은 채 오늘도 의자에 앉는다. 현재의 머릿속만큼 하얗게 질린 워드 화면을 보며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오늘은 뭘 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