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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혁 Jul 21. 2020

그래도 나는 좀 더 괜찮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과일젤리와 20km 행군

훈련소 시절 마지막 훈련인 20km 행군을 남겨두고 전 날밤을 뒤척인 적이 있다. 드디어 마지막이라는 기대감과 군장을 메고 20km를 걸어가야 한다는 두려움, 모든 게 끝나간다는 아쉬움이 뒤 섞인 그날 밤은 유난히도 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날이 밝아오자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하게 집합 준비를 시작했다.

예상과 다르게 행군은 영내에서 진행됐으며, 행군 중간중간마다 휴식시간과 함께 간식까지 제공됐다. 물론 몇몇 동기들은 지쳐서 중도포기를 하거나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땅바닥만 노려봤다. 마침내 마지막 코스를 남겨두고 과일젤리가 간식으로 나왔다. 달콤한 젤리와 과일이 주는 상큼함은 갈증을 씻어주고도 동기들의 것을 탐하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그때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뒤에 앉아있던 동기가 과일 젤리에 손도 안 대고 있었던 게 눈에 들어왔고, 나는 나보다 어린 동기한테 자존심도 버린 채 젤리를 먹지 않을 거냐고 물어봤다. '그렇다'라는 대답에 나는 허겁지겁 젤리를 챙겼고 맛있게 먹던 중에 나와 동갑이던 동기가 내 뒷자리에서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했다.

훈련 기간 동안 그 동기와 잘 붙어 지냈지만 이따금씩 그가 내뱉는 말에 기분이 상해있던 나는 훈련에 지쳤다는 좋은 핑계를 생각해두며 그 친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반박했다. 그 친구는 훈련소 기간 동안 그런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던 나의 모습에 놀란 듯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를 내고 나서도 젤리의 설탕 맛이 혀 끝에 텁텁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뭔가가 찜찜했다. 고작 훈련 하나에, 젤리 하나에, 내 인성의 밑바닥을 생판 남에게 보여줬다는 생각에 괜히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훈련이 끝나고, 수료식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고.. 훈련소 밖의 시간은 안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날 오랜만에 휴가를 나왔다 우연히 그 젤리를 발견하게 됐다. 괜히 지금 사 먹어도 그때의 맛이 여전할까라는 호기심이 든 나는 젤리를 사서 한 입 먹어 보았다. 지나치게 함유된 설탕의 텁텁한 단 맛이 마치 그때의 추억을 미화시키려는 것 마냥 불쾌하게 입 안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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