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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현 May 28. 2023

삶의 기술

괜찮아. 하면 돼.

  



  MMPI 검사를 했다. 생각보다 검사의 질문이 대단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무료 검사였기에 간이 검사였을 수도 있을 거라 여기며 빠르게 검사를 마치고, 질문이 뭐였는지도 잊고 지내다가 일하는 도중에 검사 결과를 알려준다는 전화를 받았다.


차분하고 따뜻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인사하시는 상담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 안내와 함께 상담을 진행해주셨다. 보통은 결과 위주로 알려주시던데 이분은 유독 내 얘기를 들으시고 검사 결과와 곁들여서 내 생각을 자꾸 물어보셨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나도 뭐에 홀렸는지 시시콜콜 다 얘기하게 되더라. 나를 담당하시는 상담 선생님도 아니고 단지 결과 안내를 맡으셨을 뿐인데 내가 시간을 뺏을까 봐 걱정이었다.


 나보고 다른 건 다 괜찮고 잘해 오신 것 같은데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 것 같으시다며, 검사 결과로는 리더쉽 있고 외향적인데 자기 의견을 얘기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결과로는 정말 다른 성향의 말들이 나를 표현하기에 나의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나의 고양이들과도 떨어진 채로 꽤 먼 지역에 떨어져 살다 보니 특유의 무서움이 생겼다. 외로움은 절대 아니다. 나는 원래 혼자인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외로움은 대체로 무리 속에서 더 느끼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낯선 곳을 무서워해서 내가 모르는 사회로 끼는 것을 많이 어려워했었다. 현재 상황이 너무 오랜만에 밀려오는 낯선 무서움이라 더욱이 힘들었었다. 사실 이곳으로 내려오기로 해놓고도 내려온다는 사실에 내가 힘들어했다는 걸 가까운 사람들은 알고 있다. 몇 년 전에도 내가 살기 위해 과감하게 혼자가 되기로 결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와준 분이 계시긴 하지만 짧은 인연이었고, 나도 너무 나락으로 떨어졌던 때인지라 어쩌면 혼자이면서 곧게 설 수 있게 스스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물론 고양이들이 같이 있어 주어서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이번에는 나를 업그레이드 시키기 위해 잠깐 혼자가 되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낯선 곳이다 보니 긴장도 꽤 하고 있었고 나잇값도 해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늦게 시작하는 것도 칭찬하는 요즘 분위기와는 달리 실제 늦은 사람은 조급함과 약간의 박탈감 혹은 열등감도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분명 아는 건데도 말할 땐 기억나지도 않고 생소해져 버리는 뇌의 퇴화는 핑계 같아지고 원체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다는 내 태도는 적응을 늦추는 역할만 해주기에.


 그냥 나는 타고나게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걸 힘들어하는데, 필요해서 스스로 왔으니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요즘 내 감정들을 안고 참고 있느라 검사 질문지에 소극적으로 답하게 된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약간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이전에 있던 곳에서 있었던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서였을 수도 있다고. 아직은 모르니까 소극적인 것 같다고.


 그런 얘기를 하다 보니 관계 문제에 더 집중하셨다. 익숙해지기까지 참고 감당하면 결국 괜찮아질 거라고 한 나를 도와주고 싶으셨나 보다. 그래서 난 얘길 더 꺼냈다. 스스로 '괜찮아, 다들 하는 건데 나라고 왜 못 해. 하면 돼.'라고 하면서 나를 다독인다고. '그래서 괜찮습니다!' 하니까 너무 좋다며, 건강한 방향이라고 얘기하셨다. 혹시 누구한테 들으신 거냐길래 처음엔 주변에서 해준 말이었고, 그때는 힘든 상황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자주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선생님도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으면 힘이 안 됐을 것 같다며, 하지만 스스로 얘기하면 참 응원이 되는 말 같다고 좋은 삶의 기술을 가졌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내 검사지를 보면서 모든 사람을 좋게 보지 말고 어느 정도 선을 만들어 유지하라고 하셨다. 빈칸 채우는 검사에 써놓은 걸 읽어주시면서 모두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고 실제로 나쁜 사람들도 있으니 현명하게 사람을 구분해서 보고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길러보라고 하셨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지 말고 자신을 아끼라고 하셨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선생님은 내가 가진 자원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해내는 게 많은 사람이니까 관계에서 나를 더 다듬으면 좋을 것 같다고 멋진 사람이라고 덧붙여 얘기하셨다. 나도 역시 삶의 기술이라고 표현해주셔서 더 잘 정리가 되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결국 호기심으로 시작한 검사가 나에게 큰 짐이었던 문제를 정리해준 셈이 되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이번 기회에 관계를 더 현명히 맺을 수 있도록 나를 다듬어야겠다고 느꼈고, 거기에 좋은 상담 선생님을 만나서 서로 얻은 게 있고 도움을 받아서 기분도 좋아졌다. 왜 실제로는 이런 관계를 찾기 힘들까? 하긴, 나도 언제나 좋은 컨디션이 아니라서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줬고 또 의도하지 않았어도 나는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또 힘들어진다. 아무리 용서를 구해도 사라지지 않는 미움도 있으니까. 그래서 예전에는 그러리라 믿었던 게 나이 들고 경험하면서 바뀐 게 있다.   

  

 진실은 알려져야 하고 진심은 알려야 한다는 것에서 때로는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진실도 진심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것.     


 아직도 실수가 잦고 어리석은 나도 오류가 많은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다 보니 여태 나 스스로를 조형 중이다. 학업과 기술, 재능과 재정적인 면에서도 많은 문제로 충분히 힘겹게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 서른에 겪은 큰 경험이 나를 많이 바꿨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미련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이고 또 나름 즐기고 있다. 그럼에도 관계는 힘들고 내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곧 마흔이 될 지금도 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언젠가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오늘도 나는 신경 쓰고 노력하고 바뀌고 있다.     


 그치만, 그래도 마음속엔 따뜻한 게 뭉클하니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도 깨닫고 미안하겠지. 나도 항상 짐이 많으니까. 우리 서로 기회를 또 주면 결국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에 잠긴다.  정말 잘 모르겠다. 나이 들면 좀 노련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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