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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혁 Dec 06. 2021

감정을 틀지어버리는 : 이모티콘

르-르네상스 : 다시, 인간으로 2


감정(emotion)을 표현하는 아이콘. 카카오는 '카카오프렌즈'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각기 다른 스토리를 지닌,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다. 캐릭터들은 자신의 생일이나 과거 일화가 있을 만큼 자세하다. 그렇게 재미로 무장하고, 친근하게 다가온 일러스트였다.

사람들은 유독 아이나 반려동물 같이 귀여운 것들에 취약하다. '카카오뱅크'의 성공 이유가 '카카오프렌즈' 때문이라는 말도 있을 만큼, 귀여움은 우리의 경계를 낮추고,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런 캐릭터가 우리의 감정을 대변한다. 귀여운 이들의 다양한 감정표현(미안해, 좋아, 고마워, 축하해 등)은 보내는이와 받는이 모두 좋아한다. 가볍지만, 그만큼 대화를 부드럽게 만든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이모티콘에 빠져산다.




감정 표현을 도와주려고


이제는 그 어떤 커뮤니케이션 채널도 메신저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메신저는 상대방을 직접 만나지 않아도,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언제 어디서든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게 메신저를 통해 대부분의 연락을 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고민이 생겼을 것이다. 과연 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글만으로도 충분히 나의 생각과 감정을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글은 기록이 된다. 과거의 것들은 모두 기록되고 지워지지 않는다. 이 비휘발성 특징을 통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연결된 상대방 감정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큰 단점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이라는 것 자체가 단점이다.

글은 글의 메시지를 제외한 그 무엇도 표현해주지 못한다. 글을 쓴 사람의 기분이나 진심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들이 빠져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메시지를 읽을 때 그저 과거 그의 모습을 불러와 허상과의 대화를 시도하고는 한다.

같은 의미로 글에게는 감정이 없다. 감정이 읽혀진다면 이는 보낸 이가 아닌 읽는 이의 것일 테다. 똑같은 메시지가 오더라도 읽는 이의 기분이 우울한 날이라면 슬프게 읽힐 것이고 기분이 좋은 날이라면 기분 좋게 읽힐 것이다.

그래서 글이라는 자체의 단점을 극복하고자 이모티콘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출발한 이모티콘이었다.


사진이나 그림은 글과 다르게 감정을 쉽게 내비친다. 색감이나 그림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파스텔톤은 차분함을 느끼게 하고 색채가 뚜렷한 색들은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또한 나의 이모티콘이 귀엽게 생겼다면, 더욱 나의 메시지는 부드럽게 보일 것이다.

이제는 메시지를 넘어서 이모티콘만으로도 대화를 하는 사람이 생기기도 했을 만큼 모두가 사용한다. 적어도 메신져 속 자신의 말풍선이 끝날 때 하나씩은 붙이고는 한다.

이렇듯 리모티콘은 글이 중심이 된 대화창이라는 다소 딱딱해 보이는 커뮤니케이션에 윤활제 역할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다. 이모티콘과 함께라면 약간은 부드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할 수 있거나, 대화에 활력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이런 이모티콘이 귀엽고 재미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동시에 경계해야 할 필요성도 있다.



틀에 갖힌 감정들



메신저를 제공하는 기업들은 자원봉사가가 아니다. 그들은 영리기업이다. 최근에 카카오톡이 광고를 삽입한다는 것에 반대하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카카오톡이 영리기업이라는 것을 이 사람들이 잊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광고를 삽입하는 것은 영리기업의 자유이자 기업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광고가 싫다면 사용자가 떠나면 그만인데,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만큼 메신저를 기업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이라고 믿는 힘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과 달리 그들이 제공하는 모든 서비스에는 무언가가 숨겨져있음은 분명하다. 사용자들의 질 높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할 기업들이 아니다. 철저히 자본중심적으로 움직이는 기업들이다.

이모티콘은 하나의 시장이 되었고, 각 제작사들은 자신의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고자 노력한다. 세계관을 만들고, 캐릭터를 사랑할 수 있게 다방면에서 노력한다. 그렇게 웃고만 있는 귀여운 인형들의 껍데기 속은 돈으로 가득차있을 것이다.


자신이 자주 쓰는 이모티콘을 생각해보자. 그 이모티콘은 아마도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와 같은 대표적닌 감정들만을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언제부터 저런 감정들만 있었나 생각을 해보자.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요가 있어야 한다. 대화창에서 '고맙다'는 감정이 더 많이 사용될까, '오늘 실패해서 힘들지만 다시 일어나보겠지만 그래도 슬프다'는 감정이 더 많아 사용될까. 세세한 감정들까지 만들게 되면 기업에게는 이득보다 손해가 크기에 대중적이고 자주 사용되는 감정만을 이모티콘으로 만들어낸다.

시장의 논리 아래서, 수요가 높은 특정한 감정표현과 귀여운 이미지들이 아니라면 이모티콘을 사용할 수 없다. 내 감정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 보조적 역할을 수행하던 이모티콘이 결국에는 나의 감정을 틀짓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아닌, 이모티콘이 준 감정의 선택지에서 자신의 감정을 뽑아내는 소극적인 감정 표현 방식으로. 우리의 다채로운 감정들은 자본과 자본이 만들어낸 유행 아래서 틀에 갇히게 된다.


그런 이모티콘들에도 광고가 있고, 유행이 있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카카오톡 대화창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였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것이 이상했다는 게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이모티콘의 광고가 아닐까 싶었다. 귀엽다는 댓글로 서로를 태그한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역동적인 젊은 세대의 인터넷 문화나 인싸문화와 인터넷밈이라는 이상한 문화적 요소들이 결합해 주류 이모티콘 문화를 만들어내기까지 이른다. 이렇게 특정한 인기있는 이모티콘을 중심으로 모서리에 있는 다른 감정들을 몰아낸다.

이미 이모티콘이라는 틀 안에 갖힌 감정이었지만, 유행하는 소수의 이모티콘으로 다시 한 번 틀 안의 틀에 갖힌다. 다양성의 시대에서 획일화된 감정으로 향해가는 역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옅은 미소가 번질 만큼 좋아

웃음이 새어나올 정도로 좋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만큼 좋아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을 만큼 좋아

큰 소리로 웃으며 춤을 추고 싶을 만큼 좋아



감정은 틀을 지을 수 없다. 좋다는 감정만 하더라도 너무 기뻐서 춤을 추고 싶은 좋음부터 옅은 미소를 내게 하는 작은 좋음까지 다양한 폭을 가진다. 나아가, 좋음과 싫음이 공존하기도 하며, 미안함과 고마움이 공존하기도 하는 가장 복잡한 것이 감정이다.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이 우리의 소중한 감정이다.

이런 우리의 소중한 감정이 이모티콘으로 인해 갇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모티콘은 딱딱해보이는 글자 중심 카뮤니케이션 수단인 메신저에서 우리의 대화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커뮤니케이션의 주 요소가 될 수 없다.

이모티콘보다는 솔직한 글로, 솔직한 글보다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마주보고 솔직하게 전달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의 감정을 알아주는 당신이 있어야, 당신의 감정을 알아주는 내가 있어야만 진정한 위로와 사랑과 삶이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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