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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인혁 Dec 06. 2021

재미, 자극, 말초 : 영상 콘텐츠

르-르네상스 : 다시, 인간으로 4



빨라지는 인터넷 속도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저장 공간들은 영상 산업에 큰 파랑을 불러왔다. 과거에는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었던 초고화질의 영화를 이제는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시청자가 생산자가 되는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이 등장했다. 우리는 프로슈머가 되었고, 영상 산업은 이토록 역동적일 수 없는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상의 질보다는 영상의 겉면만 발전하는 느낌이 든다. 숏폼 플랫폼에는 의미는 없고 재미뿐인 짧은 영상들이 산재해있다. 또한, OTT 플랫폼에서는 진지하기보다는 가벼운 영화들이 항상 순위권에 든다.



의미의 자리에 재미가 들어선 숏폼 콘텐츠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는 웹드라마나 유튜브 쇼츠, TV프로그램을 짜깁기한 다시보기 영상 등의 숏폼 콘텐츠로 주류 콘텐츠가 정해졌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이 러닝타임이 길고 복잡한 서사보다는 짧고 간단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장점은 짤막하게 보기 편한 스마트폰 속 스트리밍 플랫폼과 어울려 큰 시너지를 내고는 한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영상이 숏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물론, 인간이 집중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 20분 남짓하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 이에 맞추어 짧아진 러닝타임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영상 제공자들은 대부분 거대 자본에 의존하지 않는다. 방송국의 드라마나, 블록버스터 영화와는 다르다. 독립적인 개인이나, 소수의 인원이 모인 크루들이 영상을 제작한다. 그래서 긴 러닝타임을 가질 수 없고, 영상의 깊이도 깊어지기 어렵다. 긴 러닝타임은 더 긴 편집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더 돈이 들기 때문이다. 배우도 마찬가지로 일반인이나 무명 배우를 쓰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 영상이 길지 않다. 영상이 짧기에,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정보도 한정적이다. 숏폼 콘텐츠는 영화 <기생충>이나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영화 속 상징들이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런 상징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하나씩 힌트를 주기 마련이지만, 짧은 시간 안에 그 모두를 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의미 대신 재미를 택했다. 비주얼적인 요소나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무장했다. 방송국과는 달리 영상에 대한 규제도 헐겁기에 더욱 선을 넘는 내용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의미의 자리를 재미가 차지한 순간부터 우리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숏폼 콘텐츠의 장르의 대표격인 웹드라마가 제일 싫었다. 친구들이 재미있다고 추천해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제목만 읽어도 내용이 다 떠오르는, 뻔하디 뻔한 이야기들과 연기가 부족한 배우들. 오직 그들이 기댈 곳은 배우의 비주얼과 뻔한 스토리라도 찾는 사람들뿐이었을 테다. 그래서 그 영상이 나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영상에는 새로운 정보도, 의미도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나에겐 재미도 없었다.


섬광과 컴퓨터그래픽으로 칠한 블록버스터


요즘 영화들, 특히 블록버스터 영화는 시각효과에 집중한다. 웅장한 컴퓨터 그래픽과 큰 소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중독이 된다.

그런 자극에 빠지게 되면, 독립영화스러운 작품을 감상하기 어려워진다. 클래식하거나 명작이라 불리는 조금은 어려운 작품들을 끝까지 감상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마치 간간한 반찬과 함께 밥을 먹다가 맨 밥만 먹으면 아무런 맛도 안 느껴지는 것처럼. 돌아가기 어렵다.

게다가 OTT 플랫폼에사 블록버스터 영화만을 보다보면 알고리즘은 같은 영화들을 추천하기에, 말초신경 자극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목적은 예술성이라기보다는 사업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화려한 영상미를 갖추고,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서 안정적인 플롯으로 흘러가야 할 테고, 이는 할리우드 클리셰라는 개념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그들은 새로운 시도보다는 기존의 것들을 이어오기로 했다. 머리가 아닌 눈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더욱 이에 매달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영상물은 책과 달리 수동적으로 읽힌다. 책은 글을 읽어가며 글의 행간을 상상하고, 책장의 내용을 머리로 그린다. 그래서 책은 읽어가며 상상하고 생각하는 적극적인 읽는 태도가 필요하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오직 읽는 이의 몫이다. 하지만, 영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을 모방한 카메라 속 세트에는 모든 것이 표현되어 있다. 배우들의 억양과 반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요소들은 우리에게 충분한 정보를 준다. 그렇게 빡빡하게 재현된 이미지 사이에는 우리의 상상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재미뿐인 영상은 넘쳐나고, 의미는 사라져간다. 눈만 번쩍이는 콘텐츠들이 우리의 머리를 지배한다. 단순히 자극적인 것만 찾고, 자극에 익숙해진 우리는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오직 재미와 화면만이 남은 우리의 영상들이다.

비판적 사고력이 이렇게 떨어진 적은 없을 것이다. 비판적 사고를 잃은 우리는 생각하는 법과 자발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을 잊게 된다. 타인의 유혹에 쉽게 빠지거나 소수에 의해 선동되기 쉽다. 결국 초점 없는 흐린 눈으로 텅 빈 화면을 응시하는, 자신을 잃은 자신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재미뿐인 콘텐츠의 최후


재미뿐인 콘텐츠는 오래가지 못한다. 재미의 소재는 한정되어 있고, 반복과 변주에 그치고 만다. 유튜브의 등장으로 재미의 아버지격이라 할 수 있는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콘서트>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SNL>은 되려 부활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배우가 달라서, 시간대가 달라서, 타겟이 달라서일까. 사실 <SNL>은 <개그콘서트>와 달리, 풍자가 핵심이다.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재미로 풀어낸다. 결국 이는 바보같아 보이는 단순한 개그극에 숨어있는 단서들을 조합하여, 현실의 세계와 이어낸 작품이다. 이야기 밖의 이야기도 가능케 하는 수준 높은 형식인 것이다.

<개그콘서트>는 지상파 방송이였고, 그래서 수위가 한정적이었다. 함부로 선 넘는 개그를 할 수 없었고, 계속해서 유행어 같은 뻔한 반복과 변주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수위가 높아도 상관없는 유튜브가 등장했고, 유튜브 속의 개그 콘텐츠들은 선 넘는 개그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더욱 재미있는 유튜브로 넘어갔을 테고, 자연스럽게 <개그콘서트>는 잊혀지게 되었다. 많은 개그맨들이 <개그콘서트>에서 유튜브로 넘어간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SNL>은 풍자를 삼킨 개그라는 형식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의미로 살아남게 되었다.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갖추었기에 살아남았다.


재미와 의미를 잡는


재미를 찾는 영상 문화의 세상에서 시사교양이 자리잡을 곳은 없었다. 오래전에 그렇게 인기가 많던 <북극의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최근에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달랐다. 예능인지 시사교양인지 헷갈릴만큼 재미있게 봤다. 토크쇼 같은 예능인줄 알았지만, 나중에 이 프로그램이 시사교양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랄 정도였다.  

이야기꾼들이 나와서 과거의 사건들을 게스트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핵심이다. 전통적인 시사교양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서 게스트에게 전달해준다는 이 생각이 시사교양의 장르적 전환을 가져왔다. 흥미로운 사건과 이야기 형식. 이 둘은 모두가 거부할 리 없다.

기존의 딱딱한 사회자나 나레이터가 시청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시사교양과 달리, 부드러운 이야기 톤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꾼과 게스트의 이야기를 우리가 엿듣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형식 하나를 뒤틀었을 뿐인데 의미와 재미를 모두 잡는 프로그램이 된 것이다. TV에서만 아니라 유튜브와 같은 플랫폼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인간의 스토리텔링이라는 흥미를 끄는 형식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얻어내는 의미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채워준다.







요즘 사람들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열 명 중에 두 명은 운동이라 답하고 나머지는 영화 감상이라고 답하는 것 같다. 그만큼 요즘 사람들은 콘텐츠에 단단히 빠져있다. 사람들은 영화 감상이라고 말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스마트폰 속 빛나는 화면을 쳐다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See와 Watch는 다르다. See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것이고, watch는 주도적으로 시청하는 것이다. 이렇듯 콘텐츠를 보는 것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콘텐츠를 See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만 같다. 의미를 찾으려고 보기보다는 눈의 즐거움 같은 말초적 쾌감을 느끼려고 한다.

"일하기도 힘든데, 왜 취미에서까지도 힘을 들여야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계속해사 수동적인 방식으로 프로그램은 접한다면, 그 최후는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콘텐츠를 바라보는 방식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확장된다면, 우리의 눈과 머리는 초점을 잃을 것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가짜뉴스를 받아들이고, 선동에 휩쓸려버릴지도 모른다.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상징을 해석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상당히 예술적인 영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힌트를 준다. 감독들도 일반인 관람객들이 해석하며 볼 수 있도록 장치를 걸어두기 때문이다. 약간의 집중력과 약간의 비판적 사고면 충분하다.

집중한 상태로 화면을 보며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콘텐츠가 끝나고 난 뒤에는 다른 사람과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영상 콘텐츠를 소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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