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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현 Apr 15. 2022

그곳에, 또 다른 삶이 있었다

유럽 여행기

 과분한 기회로 여름날의 유럽을 이리저리 활보하던 시절이 있었다. 에코백을 들고 책 한 권을 손에 쥔 채로, <비포 시리즈>의 젊은 에단 호크가 된 것처럼 나는 세상을 설렘으로 떠안았다. 아직도 그때의 여행이 귀했던 까닭은 지난했던 나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얻지 못해 애쓰고 괴로워했던 일들 모두가 이 넓은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아직 유효하기에 나는 살아낸다. 내가 몰두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나를 만나고, 다시 나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내린 여행의 정의다.



프라하에서 만난 소년

In Prague (2018)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서, 굴렁쇠를 들고 인도의 전통춤을 선보였던 소년이 떠오른다. 하필이면 소년에 앞서 마술 공연을 했던 한국 남자가 나를 반가워하며 이 공연을 통해 얼마를 벌었고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소년의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다소 인색한 태도를 보이게 된 이유다.


나의 여행이 꽤 의미 깊었던 탓에, 지구 반 바퀴를 건너와 한날한시에 마주한 소년에게 나는 한없는 감동을 보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역시 그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중이었고 같은 여행자로서 그 소년을 만난 것이 나는 기적이라 느꼈다. 소년의 여행에 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여행 경비를 보태며 나도 당신의 이야기에 함께 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 돈을 밝힌 그 마술사처럼, 당신의 춤도 실상은 그저 돈벌이의 수단이 아닐까 하는 걱정 탓에 소년의 춤을 일찍부터 순수하게 관람할 기회를 놓쳤다. 나는 춤에 담긴 그의 이야기에 함께하고 싶었고, 여기까지 와서 그 흔한 돈벌이에 가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다소 인색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소년에게 춤의 의미를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5분 남짓 휘몰아친 소년의 몸동작에서 어떠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내가 했던 오해에 대한 사과와 앞으로 펼칠 당신의 이야기를 응원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인파들로 인해 한 발짝도 그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한 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날의 분위기와 프라하라는 도시를 휘감은 낭만을 기억한다. 군중의 눈앞에 낭만을 선사하는 이들과 군중에 섞인 여행자 모두 각자의 현실로 곧바로 돌아올 주문을 외우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단 하루의 낭만이 삶을 살아갈 만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소년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이 아주 오랜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의 여행은 ‘의미’라는 매듭을 푸는 데에 목표를 두기에 그렇다. 낯선 도시와 살면서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틈에서 나는 존재의 의미와 존재를 향한 욕망을 다시금 느낀다. 이 도시에 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사람들의 순간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이 나의 의미를 확장한다.


여행의 의미

In Heidelberg (2018)

 김영하 작가의 수필을 좋아한다. 특히 유럽을 여행하면서 그의 수필을 손에 쥐고 다녔다. <그리스인 조르바>나 <안나 카네리나>와 같은 세계 고전들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고전들을 모두 풀어줄 수 있는 책과 함께하고 싶었다. 여행은 두고 온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존재했던 작은 공간들로부터 가졌던 의문들이 이 넓은 도시와 자연에서 다시 나를 마주한다. 김영하라는 사람이 글을 쓰고 생각하는 방식이 그의 여행에 어떻게 녹아드는지, 그리고 같은 곳을 바라보았을 때의 나의 감상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나는 지켜보고 싶었다.


 특별히 그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특유의 논리성 때문이다. 그의 글이 논리적이어서 좋다는 말이 아니다. 방을 꾸미기 위해서 모든 가구를 엎어놓고 시작하는 사람처럼, 그의 글은 두서없이 전개되는 사건들이 어느새 모양새를 갖추고 서사를 이룬다. 일종의 반전이자 배신일 수 있겠다. 애증이 가득했던 지난 몇 년의 삶이 나의 것임을 인정하게 해 주었던 여행의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작가가 줄곧 말해온 것처럼 여행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옴으로써 그 의미를 완성한다.


 두 번의 유럽 여행을 했다. 처음으로 한국을 벗어났던 첫 번째 여행은 너무도 미숙하였고, 입대를 앞두고 떠난 두 번째 여행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추구의 플롯’에 해당했다.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고 되도록 진로에 대한 고민도 해결하고 싶었다. 두 여행 모두 견줄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경험이 모두 ‘뜻밖의’ 일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여행 계획을 짜는 데 활용했고 예외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나의 여행을 의미 있게 만든 것은 그런 의외성에 있다. 그리고 지나 보니 내 삶은 언제나 그런 의외성에 빚을 진다.


두 번 마주한 빅벤

In London (2017)

 첫 번째 유럽은 도피처였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두 번째 입시를 실패로 마무리한 채 추운 겨울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꿈들이 현실로 펼쳐질 것만 같았던 졸업 이후의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반복된 실패는 나를 끊임없는 수렁으로 치닫게 했고 나는 나 자신을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나를 둘러싼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예정되어 있던 영국 선교여행에 몸을 실었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떠났다. 그렇게 떠난 곳에서 빅벤을 마주했고, 지난한 내 삶과 거대한 도시를 대조해보았다. 그때 느낀 물밀 듯 떠내려오는 감정과 몸의 감각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거대한 시계탑 아래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거대한 도시, 세기의 건축물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작은 존재였다. 당연히 나의 실패도 극히 작은 내 삶의 일부였을 뿐이란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빅벤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이 여행으로부터 무엇을 얻어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낭만스러운 탈출구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고요하고 웅장한 이 건물 앞에 미칠 듯이 괴로웠던 마음이 잔잔해짐을 느꼈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은 이렇게 순식간에 찾아왔고 나를 각성시켰다.


 그때의 경험을 잊지 못해 스물두 살, 나의 두 번째 유럽 여행에 빅벤을 다시 찾았다. 이 여행이 추구의 플롯에 해당하는 이유는 내게 광활한 깨달음을 주었던 공간에 재방문함으로써 삶의 길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계획과 기대를 안고 간 탓인지 두 번째로 보았던 빅벤은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여행은 매듭을 푸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꽁꽁 싸맨 매듭 안에는 분출되지 않은 욕망과 외면했던 삶의 기억들이 담겨있다. 비로소 이를 풀어냄으로써 여행을 완성하는 것이다.


 빅벤을 다시 마주한 두 번째 여행에서 수확이 없었던 것은 여행을 통해 매듭을 완성하고자 해서일 것이다. 그때의 나는 답을 바랐기에 풀지 못했다. 여행을 통해 뭔가 소중한 것을 얻어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되려 여행을 망칠 공산이 크다.


만하임의 기차역에서

In Mannheim (2018)

 나는 입대 전 마지막 여름을 독일 어학 연수생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를 위해 꼬박 삼 년 동안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을 쏟아부었다. 이러한 배경은 내게 이 여행으로부터 배움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와 집착을 만들어주었다. 내 마음은 첫 번째 유럽 방문과 달리, 이 곳을 향해 비워져있지 못했다. 나는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실망스러웠던 빅벤의 경험을 지우기 위해 트라팔가 광장과 타워 브리지를 포함한 여러 명소를 잽싸게 돌아다녔다. 이는 욕심이었다. 시간 관리가 불안했고 결국 독일로 향하는 비행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비행기가 있어 공항 근처에 숙소를 구하는 불상사는 피했지만, 비행기표를 다시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꽤 큰 지출을 감당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의 시차가 영국보다 한 시간 늦다는 것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고야 깨우쳤다.


 유럽의 밤거리에서 나는 늘 나의 모국을 그리워했다. 유럽 도시들의 밤은 한국과 달리 나의 안전을 책임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 시 정도가 지나면 거리에는 모든 불빛이 사라진다. 당연히, 독일도 그렇다. 기숙사가 있는 하이델베르크로 나를 데려다 줄 기차는 이미 떠났고 방향만 같은 기차마저도 연착의 연착을 거듭했다.


 결국 기숙사가 있는 하이델베르크와 방향만 같은 만하임으로 향하는 기차를 자정이 넘어서야 탈 수 있었다. 암울했다. 독일의 치안이 아무리 좋은 편이라고 해도 터키 이민자들이 밤새 모여있는 기차역에서 새벽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독일 사회에 적응을 실패한 이민자들은 기차역 인근에서 노숙 생활을 했고, 학교에서도 이를 주의하라고 알린 바 있었다. ‘배움’을 위해 뛰어다닌 내 노력의 대가는 이처럼 실패에 다다랐다.

 

 그때 나를 도와준 이가 있다.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 나의 친구, 퀸이다. 그녀는 필리핀 출신의 유학생으로 같은 아시아인을 돕겠다는 신념으로 나를 기숙사 방에 들여주었다. 하얗게 질린 내 표정이 걱정되었는지 이것저것 묻더니 역에 내려서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원래는 한국인 남자 유학생 친구의 집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으나 시간이 늦어서인지 연락이 되질 않았다. 결국, 나는 그녀의 기숙사를 방문한 첫 번째 남자가 되었다. 복도에서 프랑스나 이탈리아 출신으로 보이는 유학생들이 퀸과 나를 놀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살았노라’는 생각밖에 머리에 없었다. 그녀가 마련해준 요가 매트에서 단잠을 청했다.


 다음날 일찍 수업을 들으러 먼저 나간 그녀를 뒤로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두어 번을 더 만났고 귀국일이 가까운 마지막 만남에 그녀에게 물었다.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나를 도와주었냐고. 그녀의 대답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 내가 독일에 왔을 때,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어. 현지인들은커녕 기대를 걸었던 아시아인들조차 형편이 안된다는 핑계로 서로를 외면하기 바빴지. 그래서 결심했어. 언젠가 이 머나먼 이국 땅에 잘 적응해, 이곳에서 마주치는 아시아인들을 돕겠노라고.


 비행기를 놓치고 기차는 연착을 거듭하여 암울했던 밤의 끝자락에서, 나는 너무도 멋있는 친구를 얻었다.


여행, 그리고 삶

Prague, Budapest (2018)

 흔히들 여행을 삶과 비교한다. 밑바닥을 치고서 반등을 경험하는 이들처럼 삶이 갖는 불확실성은 매력적인 리스크이다. 여행이 그렇다. 뜻하지 않은 공간과 상황에서 평생을 안고 갈 기억을 만들게 된다. 나는 빅벤에서 나 자신을 되찾았고, 만하임의 기차역에서 노숙할 뻔한 나를 구해준 친구를 만났다. 여행을 통해 삶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라는 것, 그리고 나아가 이를 즐기라는 것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이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피상적인 지식과 다르다. 나는 경험적으로 삶의 불안정성이 이끄는 찬란함을 안다. 그래서 내 삶이 자주 흔들리고 궤도를 이탈한 것처럼 보여도 이내 모양을 갖추고 빛을 발하리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유럽 전역을 돌며 에코백에 담고 다녔던 책은, 이러한 내 깨달음과 의미가 타인과 공유 가능한 자산임을 알게 해 주었다. 그러니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당신도 계획 없이 여행을 떠나시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의 삶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프라하, 하이델베르크, 부다페스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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