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볼리 Jan 07. 2021

시(詩)어가는 순간

짧지만 강한

주저리주저리 쓴 긴 말보다 한 마디의 말, 혹은 한 단어가 내 마음을 쑤실 때가 있다. 절제하며 꼭꼭 눌러 담은 글자들이 주는 생각지 못한 큰 울림은 나를 꾸짖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며 응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詩)를 좋아한다.


쉬어가는 순간

'시'어가는 순간

시를 통해 잠시 쉬어가는 순간.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다.


처음부터 시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학창 시절 내내 접한 시는 정해진 감정대로 느껴야만 했다. 행마다, 단어마다 소위 그것이 '가진' 의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난 도저히 왜 그런 주제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나보다 훨씬 많이 배운 전문가들이 그렇다는데, 그렇게 분석했다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검증된(?) 주제를 강제적으로 내 머릿속에 주입시키고 마음속에 주입시켰다.


어떤 작품을 보고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순 있겠지만, 어떻게 모든 이들이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겠나. 그런 무한의 감정 옵션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의 답을 정해놨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러니, 시가 재밌을 리가 있나.


대학 입시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보니 비로소 마음이 갔다. 내가 느끼고 싶은 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받아들였다.


물론 이상하게 여전히 눈치는 본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가?' 인터넷에 검색해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 작가가 그 시를 썼을 당시의 사회 상황 혹은 작가의 삶 정도만 참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고등학생 때 보던 '각 문장 해설, 시어가 가진 상징적 의미, 화자의 어조'와 같은 것들은 과감히 무시해야 한다.



어제 예보에도 없던 폭설이 내렸다. 쏟아지는 눈을 보며 생각난 시.


전신이 검은 까마귀,
까마귀는 까치와 다르다.
마른 가지 끝에 높이 앉아
먼 설원을 굽어보는 저
형형한 눈,
고독한 이마 그리고 날카로운 부리.
얼어붙은 지상에는
그 어디에도 낱알 한 톨 보이지 않지만
그대 차라리 눈발을 뒤지다 굶어 죽을지언정
결코 까치처럼
인가의 안마당을 넘보진 않는다.
검을 테면 철저하게 검어라.
단 한 개의 깃털도 남기지 말고……
겨울 되자 온 세상 수북이 눈은 내려
저마다 하얗게 하얗게 분장하지만
나는 빈 가지 끝에 홀로 앉아 말없이
먼 지평선을 응시하는 한 마리 검은 까마귀가 되리라.

오세영, 『자화상 2』


눈으로 하얗게 덮인 길을 걸으며 그렇게 눈을 맞으며 분장하고 있다. 지금은 눈이라도 내려서 눈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지만, 평소에는 무엇으로 날 숨겼는가. 다시금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그리고 진짜로 어떤 사람인가를 성찰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독서를 시작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