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신문만화 전쟁, 시대일보의 기발한 맞불작전
1920년대, 경성의 신문가에는 흥미로운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세 개의 주요 민간신문이 있었는데요. 먼저 1920년 창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1924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가 있었습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정론지 성격을 띠며 식자층을 대상으로 했다면, 《시대일보》는 좀 달랐습니다. 1면을 정치면 대신 사회면으로 편성하고, 3-4면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흥미 위주 기사를 집중 배치했거든요. 최초의 대중지를 지향한 신문이었던 셈이죠.
그러던 중 1924년 말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네컷만화가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만화는 국내 신문 최초의 네컷 연재만화이기도 한데요. 주인공 최멍텅과 윤바람, 신옥매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였던 '연애생활'을 일부 소재로 삼았습니다. '연애'는 지금도 사람들의 관심이 큰 주제죠? (저는 최근에 사옥미팅을 재밌게 봤답니다) 자유연애, 데이트 문화 같은 신문물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며 독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멍텅구리>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조선일보에서 만화 내용을 정리한 아래 사이트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archive.chosun.com/cartoon/toon_comics.html
그런데 《시대일보》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연애? 그럼 우리는 결혼으로 간다!"
바로 <구리귀신>의 '부부생활' 편으로 응수한 거예요. 영리한 전략이었습니다. <멍텅구리>의 주인공이 젊은 청년이었다면 <구리귀신>의 주인공은 50대 정도의 영감님이었거든요. <멍텅구리>가 연애의 탈콤함을 그렸다면, <구리귀신>은 결혼 후의 현실을 보여준 셈이었죠. 구리귀신은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지독한 구두쇠라는 뜻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일보》의 <구리귀신>은 <멍텅구리>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역시 원조는 원조인가 봅니다.
그래도 전 <멍텅구리>보다는 이 <구리귀신>에게 왠지 마음이 갔습니다. 웹툰을 볼 때 꼭 인기 1위 만화만 보지는 않는 것처럼요. <구리귀신>이 비록 <멍텅구리>보다는 인기가 덜했더라도, 2025년을 살아가는 저에게는 이 만화도 충분히 재미있었거든요. 모두가 1등만 기억할 때, 적어도 제 글을 읽는 몇몇 분만이라도 "예전에 이런 네컷만화도 있었구나!" 하고 기억해주시면 어떨까 싶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리귀신>을 다시 소환해봤습니다. 다행히 구리귀신 1화의 원문 신문기사가 남아있어서 직접 보여드릴 수 있는데요. 100년 전 조선 부부의 일상, 함께 엿보시겠어요?
(1) 구리귀신이 마누라 없는 사이에 나갔다 들어오니
하녀 : 마님께서는 영감께서 몰래 나가셨다고 온종일 화를 내시다가 나가시더니 아직까지 안 들어오셨어요.
구리귀신 : 그것 미상불(未嘗不) 잘 되었군(=그것 참 잘 되었군)
해석 : 마누라가 없는 사이, 집에 들어온 구리귀신 구리귀신이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님이 영감(=구리귀신)이 몰래 나갔다고 온종일 화를 내다가 집을 나가버리고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는 상황입니다. 인물은 나오지 않지만 정황상 앞의 말은 뒤에 나오는 하녀의 말인 듯합니다. 구리귀신은 ‘그것 참 잘 되었군!’(미상불 잘 되었다) 하고 이야기하는데요. 즉, 아내의 부재가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는 뜻입니다.
(2) 억척같은 마누라가 없어서 평생 처음으로 자유롭게 놀았지만,
구리귀신 : 내가 이렇게 늦게 들어와도 딱정떼(마누라)가 없으니 자볼기는 면했지. 자동차에 치여 죽지나 않나?... 앗차, 너무 과한 소리 했나? 더운데 빙수나 사오랠까? 히히...
딱정떼 : 성질이 온순한 맛이 없이 딱딱한 사람
자볼기 : 자막대기로 때리는 볼기
활개를 벌리다 : 제 세상인 양 함부로 행동하다
해석 : 남편의 자유와 해방감
억척같은(강하고 까칠한) 마누라가 없어 평생 처음으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며 늦게까지 밖에서 놀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늦게 들어와도 딱정떼(성질이 딱딱한 사람, 즉 마누라)가 없으니 자볼기(매 맞는 것)는 면했지. (마누라가) 자동차에 치여 죽지나 않나?… 앗차, 너무 과한 소리를 했나? 더운데 빙수나 사오랠까?'라며 한껏 해방감을 만끽합니다.
(3) 하녀의 꾀에 넘어가서 양복을 벗어서 의걸이에 걸려고 할 때
하녀 : 빙수는 시켰습니다. 그런데 양복을 입고 계시면 늦게 들어오신 것 같지 않아요?
구리귀신 : 그것도 그래. 그러면 벗어서 의걸이에 놓지.
의걸이 : 위는 옷을 걸 수 있고, 아래는 반닫이로 된 장
해석 : 하녀의 꾀와 위기관리
구리귀신이 집에 늦게 들어온 것을 들킬까 걱정할 때, 하녀가 '빙수는 시켰습니다. 그런데 양복을 입고 계시면 늦게 들어오신 것 같지 않아요?'라며 기지를 발휘합니다.
구리귀신은 '그것도 그래!' 하면서 양복을 벗어 의걸이장에 걸려고 합니다. 늦게 들어온 흔적을 감추려는 상황입니다.
(4) 억척같은 마누라가 나간 게 아니다. 의걸이에 숨어있었다
아내 : 뭐라고? 딱정떼? 그리고 자동차에 치여 죽어?! 이 망나니야! 늦게 들어와서 하는 소리야?
구리귀신 : 무엇?!
해석 : 마누라의 반전 등장과 혼쭐
그런데 알고 보니 '아내가 나간 게 아니라, 의걸이장에 숨어있었다'는 게 밝혀집니다. 아내가 튀어나와 '뭐라고? 딱정떼?! 그리고 자동차에 치여 죽어?! 이 망나니야! 늦게 들어와서 하는 소리야?'라고 화를 내며 남편을 몰아붙입니다. 구리귀신은 당황하며 '무엇?!' 하고 놀랍니다.
남편은 마누라가 없는 동안 자유와 해방을 즐기지만, 아내는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남편의 허세와 기만을 단번에 적발합니다. 전형적인 1920년대 부부의 알콩달콩(혹은 좌충우돌)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린 네컷 만화입니다. "딱정떼", "자볼기", "활개를 벌리다" 같은 당시 표현이 일상의 구체적 감정과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 줍니다. 결국 마누라 앞에선 꼼짝 못 하는 영감님의 모습! 유쾌한 부부 에피소드입니다.
이 만화를 보면서 놀란 건, 부부간의 미묘한 심리전이 지금과 거의 똑같다는 점이었어요. 당시에도 "남존여비사상의 해체"를 풍자했다고 하니, 전통적인 부부관계에서 벗어나 좀 더 평등한(?) 관계를 유머로 그려낸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구리귀신의 또 다른 에피소드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