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싸름한 꼬 사무이의 추억
신혼여행의 로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토요일 결혼식 후 일요일에 출발하는 빡시고도 빡신 일정. 어떻게든 경조휴가에 맞춰 신혼여행을 욱여넣어야 하는, 안정적이면서도 애달픈 직장인과의 결혼은 그런 것이었다. 이런 애달픔을 느낌과 동시에 느낀 것은 설렘. 생애 첫 여행은 아니지만은 그래도 나름 ‘허니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은 여타 다른 여행과는 확실히 달랐다.
결혼식의 꽃잎이 아직 마음속에서 채 저물기 전에 옮기는 발걸음은 한 걸음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하면서도 말캉말캉하고 살랑살랑한 느낌이랄까. 라는 마음과는 상반되는 새벽녘의 하늘은 옥에 티. 전날 밤 식을 마치고 짐을 꾸리면서도 전혀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F감성이 물씬 차올랐다. 결혼식은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자리, 축복받는 자리라면 신행은 자축하는 자리다. 이제 찐으로다가 우리만의 시간이로구나!
F감성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고 해서 기본 바탕이 극T인 내가 커플티에 도전하는 수고로움까지는 차마 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래도 새로이 시도한 것이 있었다. 평소엔 무조건 자유여행파였던 내가 생애 처음으로 패키지를 선택한 것이다.
신혼여행이라는 특별한 목적 앞에서 ‘패키지의 편안함’이라는 달콤함은 like 당에 절여진 삶을 살다 3개월 간 저탄고지라는 처방이 내려진 다이어터에게 내려진 딱 한 번의 자유. 꾸덕한 수제크림이 잔뜩 올려진 달다구리한 크림라떼와도 같았다. 이걸 누가 마다해. (TMI_나는 지금 저탄고지 다이어트 두 달차이다.)
게다가 호갱이 될까 두려웠던 나에게 남편은 패키지에 자신이 있다며 등을 툭툭 쳤다. 그 미묘한 든든함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디선가 얇은 불길함이 뒷목을 스리슬쩍 스쳤다.
패키지의 함정
여러 고민을 거친 후 결정된 우리의 신혼여행지는 꼬 사무이(코사무이)였다. 숙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로 가이드와 일정을 짜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남편이 추가 옵션 3개를 덜컥 추가했다. 스쿠버다이빙 그리고 랍스터, 하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정도는 다 하는데..."라는 가이드의 꼬심에 나도 아니고 남편이 홀랑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우리가 정해진 일정에서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반자유여행일 줄 알았던 여행은 사실상 가이드가 일정을 짜는 완전 패키지였다. 같은 일정은 중복이 안된다고 했다. 즉, 자유 일정은 딱 하루만 선택할 수 있는 거였다. 이게 무슨....소리죠..?
가벼울 거라 생각했던 우리의 여행은 시작부터 무거워졌다. 체크인도 하기 전에 다음 픽업 시간이 우리를 재촉했고 ‘여유’라는 단어는 입국 심사대에서 이미 반납된 듯했다. 내가 믿었던 든든한 어깨는 방향을 잃은 나침반이 되었고, ‘편할 것’으로 생각했던 패키지는 우리 둘의 리듬을 뭉툭하게 깎아냈다.
달콤함 반, 쌉싸름함 반
숙소는 분명 좋았다. 침대는 구름 같고 수영장은 엷은 하늘을 품고 있었고 발코니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딱 휴가의 온도였다. 그런데 그 모든 호사는 손바닥으로 물을 뜨듯 스쳐 갈 뿐이었다. 옵션이 부르는 이동과 집합 사이에서 있으나 마나 한 호사라는 말이 딱 맞을 것이다. 우리가 빌린 건 좋은 방이 아니라 잠깐의 탈의실 같았고, 풍경은 배경으로 지나가기만 했다.
그래도 달콤함은 여전히 있었다. 우리만의 자유 일정을 택한 날. 느지막이 일어나 그림 같은 조식을 먹고 하루 종일 수영장 물결이 종아리를 감싸던 온기, 잠시나마 야시장을 구경하는 것 같은 사소한 기쁨들이었다. 그리고 정해진 패키지 일정에서도 분명 좋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쌉싸름함도 분명했다. 정해진 일정으로의 이동 사이에 우리가 놓친 건 길거리의 로컬 카페 한 잔, 한 번쯤 길을 잃어도 괜찮았을 산책, 그리고 왜 있는지 영문을 모를 삼국지 관우상 구경으로 허비한 시간 같은 거였다. 경치가 기가 막히던 카페에서는 딱 30분이었나 1시간 만의 여유가 주어졌다.
여행의 온도는 적당했지만, 속도가 빠르면 맛은 옅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호사는 시간이 스며들 때에만 제값을 한다는 것도.
그리고 화면 너머 아이의 모습. 신혼여행은 근 반 년 동안 내내 붙어있던 나의 피붙이와 처음으로 떨어져 본 시간이었다. 매일 밤낮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엄마는 로아가 잘 먹고 잘 잔다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옹알이를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잘 지내서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전화를 끊으면 바다가 더 넓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이 살짝 비어 보였고 그 빈틈으로 짭짤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달콤함에 자연스레 스민 짠맛이랄까. 우리의 신혼여행은 단짠단짠 루틴이었다. 내맘이 단짠단짠...습하..
마지막 날의 대미: 강매와 충동구매
어느덧 우리는 신혼여행 마지막날을 맞이했다. 대다수의 패키지여행이 그렇듯 마지막 코스는 '쇼핑센터'였다. 가게를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 보고 웃었다. 웃음에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지갑을 꺼내지 않는 우리를 보며 가이드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그래도 “그래, 마지막이니까...” 하며 들어간 마지막 기념품 가게에서 우리는 야돔이라는 것을 비싸게, 그것도 여러 개 샀다. 드디어 가이드의 표정이 대략 30%정도는 펴졌다. 추억이라 생각하면 가격은 늘 관대해지니까.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자 더 다양한 물건들이, 사고 싶은 것들이 즐비했다. 그 앞에서 우리의 관대함은 아쉬움과 후회로 변했다.
게다가 남은 시간까지 살짝 출출했던 상황. 그놈의 야돔만 안 샀어도 풍족하게 마지막 만찬을 즐겼을텐데. 하지만 빈털터리가 된 우리의 배는 야속하게도 음식을 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마지막 남은 예비비까지 탈탈 털어 음식을 사 먹기로 했다. 그리고 이때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는 명언을 남편이 남겼다.
"어차피 자기(남편이 아닌 나를 지칭)는 조금 먹지 않느냐. 그러니 내(내가 아닌 남편을 지칭)가 먹고 싶은 것을 2개 시켜야 한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는 말이다.
허니문 사용설명서
패키지는 분명 편리했다. 이동과 식사가 알아서 정리되고, 고민의 70%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로망은 대개 ‘여백’을 먹고 자란다. 누군가는 이 편리함을 사랑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여행은 ‘편리의 총합’이 아니라 ‘함께 느리게 머무른 시간의 총합'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결국 중요한 건 일정표가 아니라, 그 일정표 사이사이에 흘러들던 숨, 눈빛, 그리고 “조금 더 있을까?” 같은 사소한 대화였다.
다시 간다면, 절대 x100 '옵션'따위는 아니, 패키지는 가지 않겠다. 경험상 옵션 하나를 넣으면, 다른 둘은 자연스레 포기하게 된다. 그 포기에서 오는 결핍감은 의외로 크다. 차라리 일정 없이 떠나, 숙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과제로 넣자. 침대에 더 오래 눕고, 수영장에 한 번 더 들어가고, 발코니 바람을 이유 없이 오래 맞는 것. 호사는 ‘머무름’에서 출현한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쇼핑. 마지막 날의 들뜬 마음은 지갑을 무장해제시킨다. 공항에서 2차 검증을 거치면 의외로 평정심이 돌아온다. “지금 당장 아니면 못 사”는 말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지금’보다 ‘기억’이 더 오래간다. 그러니 마음이 흔들릴 때는 발걸음을 한 번 멈추고, 서로에게 질문 하나를 건네자.
“이거 꼭 필요할까? 한 번 더 생각해 봐!” 그리고 아무리 P여도 사기 전에는 스마트하게 스마트폰으로 꼭 해당 물건을 검색해 보자.
마지막으로, 아이와의 연결. 처음으로 아이와 오래 떨어졌던 날들. 통화가 끝난 후 “오늘은 조금 더 보고 싶네” 같은 한 문장을 서로에게 작은 의식을 남겼다. 그 한 문장은 죄책감의 물결을 낮추고, 우리 둘의 밤을 다정하게 정리해 주었다. 신혼여행은 둘만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부모로서의 첫 장거리 훈련이기도 했다.
달콤쌉싸름해서 비로소 기억된다
돌아보면, 꼬 사무이의 바다보다 선명한 건 우리였다. 일정에 쫓기며 허둥지둥 뛰던 발걸음, 비싸게 산 야돔을 들고 그래도 기념품을 사긴 샀다며 안심했던 순간, 통화를 끊고 나서 조금 적막해진 방 안의 공기까지. 완벽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았다. 사진 속 풍경은 시간이 흐르면 비슷해지지만, 불완전한 우리의 표정은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우리의 것이었다.
우리의 허니문은 '이렇게 하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의 리스트를 남겼지만, 동시에 '다음엔 이렇게 해보자!'는 사용설명서의 초안을 만들어 주었다.
여행의 기술은 숙련이 아니라 합의에서 성숙한다. 느리게 걷자, 적게 담자, 오래 머물자. 그리고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해 주자. 그렇게 첫 단추를 꿰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단단해졌다. 달콤쌉싸름한 기억이야말로, 앞으로의 여정에 끊임없이 당을 보태 줄 비상식량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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