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차 며느리. 이제 제사 때 전을 부치지 않는다. 기력이 달려서 오랜 시간 서서 음식 하는 게 힘들어진 시어머니의 제안이었다. 며느리의 고생을 덜어주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전을 부치지 않는다는 단편적인 팩트를 뛰어넘어 그간의 고된 시간들을 인정받고 배려받는 기분이다. 제사 때마다 일용직 같았던 나는 이제 가족이 됐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막장드라마 혹은 그 이상의 날들을 묵묵히, 무사히 건너온 결과다.
손윗시누이 둘에 외아들인 남편과 결혼했다. 시가는 조상 모시기에 열과 성을 다하는 집안으로, 조상덕을 보고 있다고 믿는다. 당연히 제사에 '아주' 진심이다.
기제사 4번에 차례 2번. 이것이 공식적인 제사 일정이다.
결혼 후 첫제사를 떠올려 본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고기를 삶고 굽고, 생선을 찌고, 문어를 데치고, 낙지를 나무젓가락에 말고, 머리가 달린 닭을 삶고. 또 뭐가 있더라. 전 종류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시어머니는 "제삿날에는 집에 기름 냄새가 자글자글 나야 한다"며 동태전, 동그랑땡, 두부, 녹두전은 야채전에 애호박전, 굴전 등 시기별로두어 가지가추가했다.
그래, 음식이야 뭐.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몸이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건 왜 이랬냐, 이건 뭘 해놓은 거냐. 시어머니에 두 시누이까지 맹수 같은 눈빛의 합이 세 쌍이었으니 정신의 고통은 육체의 그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고됐다. 나는 무보수 일용직 일꾼 같았다.
첫 명절은 더 끔찍했다. 명절 한 두 주 전에 벌초를 하고 명절 당일 차례를 지낸 후 성묘를 갔다. 돌아왔을 땐 한밤중. 나를 더 힘들게 한 건 종일 음식하고 차리고 치우고 또 하고를 반복하는 여자와 차려주는 음식 먹고 마시고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는 남자의 극명한 차이였다. 역시 나는 무보수 일용직 일꾼이었다.
이 외에도 차마 글로 다 열거할 수 없는 부당한 상황을 겪고 버티며 10여 년을 보냈다. 그 사이 나는 손이 귀한 집안에서 아들에 딸까지 낳았다. 그리고 미련하게 우직했다. 시어머니는 연세가 많이 드셨고. '덕분에'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제사를 보내는 고충의 강도는 조금씩 약해졌다.
"이번 제사 음식은 우리 식구 한 번 딱 먹을 만큼만 하자."는 시어머니는 매번 이전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양의 음식을 계획하셨다. 나물, 고기, 탕, 생선 등은 어차피 비슷하고, 전이 문제인데.. 조금만 하자시던 시어머니는 어째선지 동태전, 동그랑땡, 두부전, 녹두전에 야채, 새우, 고기 등등등 자꾸 다른 부칠 거리를 준비하셨다.
"어머님. 조금만 하자시더니 엄청 많은데요~~??"너스레를 떨면서도 곰같이 전을 부쳤다. 다행인 것은 남편이 쉬는 날에는 같이 한다는 것. 설거지도 맡긴다. 예전처럼 놀고먹고 자지 않는다.
최근 1~2년 사이에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진 시어머니는 오랜 시간 서서 제사 음식을 하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몸이 힘들다신다. 그런 시어머니를 보며 나는 쉬셔도 혼자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곤 한다.
"제사가 벌써 몇 번짼데요~! 제가 다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시어머니는 몇 번 거절하시다소파에 앉지만 얼마 안 가 주방으로 돌아오시고.
그렇게 몇 번의 제사와 명절을 보낸 후 시어머니는 결국 전이라도 사자는 제안을 하신 것이다. 시어머니 건강 상의 이유가 컸겠지만 나는 며느리에게 짐을 다 넘기고 싶지 않은 시어머니의 배려 때문이라고 믿는다. 10여 년을 같이 보내온 연민 같은 것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전을 산다는 것은 전을 부치지 않는다는 단편적인 팩트 그 이상의 의미다. 결혼 초 일꾼 같았던 내가 인정받고 배려받는 가족이 된 기분. 많은 종류의 음식 중 겨우 전 하나 사는 것뿐인데도 음식 준비가 힘들지 않고, 자연스레 끔찍했던 제사 스트레스도 줄었다.
이번 추석에도 전을 사기로 했다. 동네서 평이 좋은 전집에 미리 주문해 놓았다. 그렇다고 명절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년에 비해 적은 것은 확실하다.
명절은 가족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화목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이다. 조상을 섬겨야 한다는 이유로, 전통이라는 이유로 케케묵은 노동만을 강요하다 서로 다투고 등을 돌리고 해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요즘은 조상덕 보는 사람은 명절에 해외여행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 차려 절하고 돌아와 이혼한다고 하지 않던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며 조금의 유연함만 가져도 명절은 한결 화목해질 수 있다. 이번 추석에는 부디 많은 가정이 웃을 수 있길, 바란다.